女の舞台-笹みどり 作詩.作曲.編曲 継 正信
一 よわい女が生きてく道は 廻り舞台の人生模様 水に流したあの日の夢を 何故にきれない 三の糸
二 男まさりと云われましょうが 義理につまずき泪が落ちる 芸はうるもの心は一つ 好きなお方にあげるもの
三 泣いてひきます私のまゆに どこかにている三か月淋い 情け深川 小唄の辰巳 生命かけます舞扇
伊藤을 잡고 房門을 박차니... 朝鮮 統監府의 初代 統監 伊藤博文이 所任을 마치고 日本으로 還國한 1909年 2月 9日 大韓每日申報의 '사조'란에 ' 逐邪經'이란 노래가 收錄되어 있습니다.
"伊藤을 잡고, 흐응. 房門을 박차니 흥. 魑魅魍魎(이매망량)이 줄행랑하노나, 아. 어리화, 좋다, 흐응. 경사가 났고나, 흥."
이 노래를 지은이는 알 수 없는데 노래의 題目에 보이는 '逐邪'라는 말은 '邪惡한 무리를 몰아내다'라는 뜻이다. 첫 句節에 '伊藤을 잡고 房門을 박차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노래는 伊藤博文이 韓國을 떠나가게 된 것을 놓고 발길로 내차고 싶은 心境을 比喩的으로 表現한 것입니다.
伊藤이 還國하게 되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함께 따라나서는 것을 보고 마치 魑魅魍魎(이매망량=온갖 도깨비 같은 무리들)처럼 모두 함께 줄행랑을 친다고 그 場面을 諷刺하고 있습니다.
伊藤이 初代 統監으로 赴任한 것은 1906年 3月 2日입니다(馬車에 앉은 두 사람 中 왼쪽이 伊藤博文). 그는 朝鮮 統監이라는 絶對 權力者로 3年 동안 韓國 倂呑의 基礎 工作을 指揮했습니다.
赴任 初부터 모든 文官들에게 武官 制服을 갖추도록 하여 軍國主義 氣風을 불러일으켰던 그는 强制 締結한 乙巳勒約에 따라 韓國의 外交權과 軍事權•警察權을 모두 掌握했습니다.
그리고 外國 資本의 浸透를 막는다는 口實을 내세워 韓國 內의 모든 公共事業을 日本이 獨占하고 日本 資本의 韓國 進出을 督勵했습니다. 그리하여 韓國 經濟가 日本에 對한 依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1907年 高宗이 乙巳勒約의 不當함을 世界에 알리려 했던 '헤이그 特使 事件'이 일어나자, 伊藤은 이를 빌미 삼아 高宗을 强制 退位시켰습니다. 이어 純宗을 壓迫하여 韓日新協約을 締結하였고 借款政治를 施行하면서 韓國의 軍隊를 解散했습니다.
日本 國內 政治의 影響으로 歸國하게 된 伊藤은 出國 直前인 2月 8日 昌德宮에 가서 純宗皇帝께 辭陛하였고, 自身이 廢位시켰던 高宗께도 形式的인 人事를 드렸습니다.
伊藤博文이 日本 軍艦을 타고 仁川港을 떠나던 날 總理大臣 李完用을 비롯해 各部 大臣 全員이 中樞院 議長 金允植 等과 함께 伊藤을 歡送하기 爲해 仁川港까지 나갔습니다(大韓每日申報 1909.2.11.). 伊藤은 歸國 後 日本 樞密院 議長이 되어 權座를 누렸으나, 그 해 가을 러시아 財務大臣 코코프체프와 會談하기 爲해 滿洲 하얼빈을 訪問했다가, 10月 26日 하얼빈驛에서 安重根 義士에게 狙擊 當해 死亡했습니다.
그런데 伊藤이 歸國한 지 몇 달 後 大韓每日申報(1909年 7月 30日字)는 興味로운 記事를 실었습니다. 伊藤이 歸國하면서 奎章閣에 保管 中이던 歸重한 書冊 800余卷을 不法으로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이 新聞은 太祖高 皇帝 當時 編纂한 '八域地圖'라는 冊 2卷도 이때 가져갔다고 告發하면서, "어떤 者가 아첨하기 爲하여 이들 貴重 書冊을 伊藤에게 내어준 것 같다"고 적었습니다. 이것이 事實이라면 이 書冊들은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그 所在를 찾아 모두 돌려받아야 합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