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釜ヶ崎人情-三音英次///朝鮮時代 仙人들의 旅行法

bsk5865 2013. 11. 18. 15:2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1.18 06:28

 

釜ヶ崎人情-三音英次///朝鮮時代 仙人들의 旅行法(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4350 


釜ヶ崎人情-三音英次


釜ヶ崎人情-三音英次

作詞 もず唱平 作曲 三山敏 編曲 都築潤


立ちん坊人生 味なもの
通天閣さえ 立ちん坊さ
だれに遠慮が いるじゃなし
じんわり待って 出直そう
ここは天国 ここは天国 釜ヶ崎


身の上話に オチがつき
ここまで落ちたと いうけれど
根性はまる出し まる裸
義理も人情も ドヤもある
ここは天国 ここは天国 釜ヶ崎


命があったら 死にはせぬ
あくせくせんでも のんびりと
七分五厘で 生きられる
人はスラムと いうけれど
ここは天国 ここは天国 釜ヶ崎


朝鮮時代 仙人들의 旅行法

旅行은 日常에서 벗어나 다른 空間으로 移動하며 보고,듣고,느끼고, 體驗하는 過程입니다. 日常을 내려놓을 수 있는 休日이 前提돼야 합니다. 朝鮮時代에도 休日은 있었습니다. 官僚의 境遇에 설과 秋夕,王과 王妃의 生日및 忌日 等 年中 20日 程度였습니다. 勿論 父母喪을 當하거나 本人 또는 家族이 아픈 境遇에는 追加로 休暇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休日 制度로만 보면 朝鮮時代 旅行이 可能한 階層은 極히 一部였습니다. 當時의 道路網과 移動手段을 勘案하면 時間 및 經費에 拘碍 받지 않는, 卽 官職에서 물러 난 富裕한 士大夫가 旅行을 享有할 最適의 條件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府尹,牧使,府使,縣監 等 地方官廳의 우두머리인 首領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休暇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官衙를 通해서 본 朝鮮時代 生活史’에 따르면 首領은 農繁期이자 郡政이 바쁜 8~12月에는 臥病中인 父母에 對한 問安이 아닌 以上 勤務地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權力이 있다고 해서 無時로 旅行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農業과 商工業에 從事하는 常民은 生計에 몸이 묶여 있어 事實上 旅行이 不可能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賤民은 旅行을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朝鮮時代 官奴婢에게는 農繁期를 앞둔 陰曆 2月 1日,딱 하루의 休日이 주어졌습니다.

譯官,醫官,회원,天文官 等 專門職에 從事하는 中人 階層은 身分이나 經濟力 側面에서 그나마 自由로워 相對的으로 旅行 機會가 많았을 것으로 推定됩니다. 當時 거의 唯一한 海外旅行 機會로,每年 數 次例 中國 燕京(베이징)을 다녀오는 使臣團에도 많은 中人들이 參與했습니다. 正祖 13年(1789) 冬至使 使節團의 一員으로 參加해 13幅의 ‘燕行圖’를 남긴 단원 金弘道기 代表的입니다.


靑鶴洞은 朝鮮時代에도 人氣 旅行地

朝鮮時代 旅行의 전범은 遊山記를 通해 確認할 수 있습니다. 遊山記란 兩班家 士大夫들이 名山에 오른 體驗을 散文으로 남긴 記錄으로 現在 約 560編이 傳해집니다. 遊覽의 動機,目的,同行人,準備過程,旅程,感興 等이 詳細히 記述돼 있습니다.

遊山記를 살 퍼보면 朝鮮時代나 지금이나 旅行의 動機에는 큰 差異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韓國學中央硏究院 정치영 敎授가 朝鮮時代 士大夫의 金剛山,淸凉山,智異山 遊山記 62篇을 各各 分析한 論文에 따르면 ‘아름답고 雄壯한 山水를 鑑賞하고자 하는 欲求’가 當時 가장 一般的인 旅行 動機였습니다. 特히 朝鮮에서 가장 빼어나고 奇異한 景致를 품었다는 金剛山에 對한 士大夫들의 회원은 金剛山 遊山記에 거의 빠지지 않고 登場합니다.

學問과 心身修練도 士大夫들의 主要 旅行 動機였습니다. 士大夫들은 旅行을 事物의 理致를 깨닫는 工夫의 한 手段이자 浩然之氣를 기르는 捷徑으로 삼았습니다. 朝鮮 前期 文臣인 金宗直은 智異山에 오르는 까닭을 “보름밤에 天王峯에서 달 구경하고, 새벽에 해돋이를 맞이하며,아침에 四方을 두루 眺望하기 爲해서”라고 적었습니다. 많은 遊山記에 孔子의 ‘登泰山小天下’와 論語의 ‘仁者樂山 智者樂水’가 引用된 것도 같은 脈絡입니다. 또 朝鮮 中期 司諫院 大諫을 歷任한 朴汝樑은 “山을 遊覽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披瀝했습니다. 雄壯하고 驚異로운 名山의 景觀은 性理學의 理致를 習得할 수 있는 經典과 마찬가지라는 얘기입니다. 朴汝樑은 智異山 遊覽에 앞서 學問을 닦듯이 每日 나막신에 지팡이를 짚고 自宅 隣近 산골짜기를 往來하며 體力 增强에 힘을 기울였다 고합니다.

士大夫들은 또한 文化遺産과 仙人들의 발 자취를 찾기 爲해 遊覽을 떠났습니다. 仙人들이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場所와 歷史 遺跡을 찾아 가 自身의 눈과 마음으로 體驗하고자 했습니다. 智異山、靑鶴洞도 그 中 하나였습니다. 최지원이 隱居하다 神仙이 되었다고 傳해지는, 푸른 鶴이 棲息한다는 理想鄕 靑鶴洞은 오늘날은 물론 朝鮮時代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旅行地였습니다.


山속에서 북치고 피리 불고

朝鮮時代 遊山記에 나타난 旅行 準備物 및 同伴者는 지금과 큰 差異를 보입니다 于先,山에서 밥을 지어 먹어야 했기에 쌀과 副食,솥과 밥그릇 等을 챙겼습니다. 또 餘分의 짚신과 衣服,寢具 等도 챙겼습니다. 非常食糧으로는 쌀가루, 미숫가루,肉脯, 말린 꿩 고기,과일이 代表的이었습니다. 이밖에 하루의 旅程과 感興을 記錄할 文房四友와 旅程 中에 읽을 書冊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旅行에 必要한 物品을 지고 나르는 일은 奴僕들이 擔當했습니다. 旅行者에 따라 樂工을 帶同하는 境遇도 있었는데,깊은 山속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호랑이를 쫓았다고 합니다. 勿論, 모든 士大夫가 奴僕을 帶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6世紀 土亭 李之函은 百姓들의 삶을 돌아보기 爲해 全國을 周遊했는데, 名門家의 後孫임에도 홀로 머리에 갓 代身 솥을 쓰고 다녔다고 傳해집니다.

朝鮮時代 旅行客의 移動 方式은 常民은 徒步,兩班은 말이 普遍的이 었습니다. 勿論,兩班이라 해도 經濟 事情이 如意치 않는 境遇에는 오직 짚신과 지팡이에만 依支해 걸었습니다. 몇몇 淸凉山 遊山記에는 돌길이나 미끄러운 길을 갈 때 소를 탔다는 記錄도 있습니다. 朝鮮 前期 淸白吏로 잘 알려진 孟思誠처럼 말입니다. 덮개 없는 椅子形 가마인 籃輿(람여)는 16世紀 末 金剛山에 처음 登場해 全國으로 擴大됐었습니다. 宿泊 施設로는 나그네에게 飮食을 팔고 잠자리를 提供하던 院(원),酒幕,客主가 있었습니다. 또 中央과 地方間 連絡 및 物資 運送을 爲해 國家에서 設置한 驛도 宿泊 施設로 機能했습니다. 士大夫 旅行者들은 大部分 親姻戚이나 知人들의 집을 宿泊地로 利用하며 旅行하는 境遇가 많았습니다. 自身 또는 親知가 官員인 境遇에는 主로 官衙 施設인 客舍를 利用했습니다. 酒幕은 壬辰倭亂 以後 人口 移動이 活潑해지면서 一般化됐습니다. 19世紀에 이르면 酒幕 없는 고을이 없었다고 합니다.

朝鮮時代 交通網은 漢陽을 出發地로 삼아 義州,慶興,平海,東來,海南,江華까지 이어지는 6大 大路가 幹線道路 役割을 했습니다. 金剛山 旅行者는 慶興路를, 平壤 大同江 旅行客은 義州路를 各各 利用했습니다.


朝鮮時代 酒幕은 朝食 提供

朝鮮은 槿域三千里로 불리는,南北 길이 1천km가 넘는 나라였습니다. 鴨綠江과 豆滿江 너머 間島까지 包含하면 現在 南韓 面積의 서너 배에 이르렀습니다. 時間的 經濟的 制約이 많던 時代인지라 平生 다 돌아보기에 벅찬 領土였습니다.

木浦大 조용호 敎授가 發掘해 펴낸 ‘19世紀 선비의 義州•金剛山 紀行’을 보면 朝鮮 後期 士大夫 들의 旅行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紀行文의 原作은 ‘金剛日記 附 西遊錄" 으로 著者는 晋州 姜氏 門中의 姜羲永으로 推定됩니다. 進士인 著者는 1841年 봄 親舊들과 함께 成均館을 出發해 20余 日 동안 金剛山을 다녀옵니다. 또 1846年 初겨울에는 40余 日 동안 開城,平壤을 거쳐 義州를 다녀옵니다.

姜 進士는 金剛山은 徒步로,義州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말은 馬夫가 앞에서 끌었습니다. 記錄을 보면 날이 추운 날에는 말 위가 아래보다 寒氣가 甚해 아예 말에서 내려 걸었다고 합니다. 宿泊은 大槪 酒幕을 利用했습니다. 酒幕에서 머문 다음날 旅程은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말에게 여물을 먹이는 것으로 始作됐습니다. 以後 行裝을 꾸려 새벽 未明에 별을 보고 길을 떠났습니다.酒幕 宿泊客에게는 밥이나 떡 等의 朝食이 提供됐습니다. 어떤 날은 出發時 요기거리를 準備해 길에서 點心을 解決하기도 했습니다. 親舊인 義州府尹의 管轄區域 內에서는 客舍를 利用했습니다.


‘名勝地에 이름 새기기’는 오랜 傳統

韓國人 旅行客은 國內는 勿論 全 世界 有名 觀光地마다 이름 따위를 새겨놓는 것으로 定評이 났습니다. 지금도 完全히 사라지지 않아 沒知覺 한 行態로 종종 非難 받곤 합니다. 하지만 그 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름 새기기가 우리네 旅行 風俗의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朝鮮時代 旅行記를 살펴보면 ‘名勝地에 이름 새기기’는 極히 自然스런 風景이었습니다. 名勝地의 岩壁이나 너럭바위는 題名하기에 좋은 空間이었습니다. 特히 金剛山 萬瀑洞은 워낙 많은 이들이 이름을 새기는 바람에 더 이상 글씨를 쓸 만한 자리를 찾기 힘들 程度였습니다. 앞서 紹介한 姜 進士 亦是 萬瀑洞 磐石 위에 가득한 글들을 보고는‘그들의 이름을 擧論하면 眞實로 反 朝廷이라 할 만하다’라고 했습니다.

勿論,朝鮮時代에도 題名을 批判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16世紀 性理學者 南冥 曺植은 智異山 山行 中 바위에 쓴 글씨를 發見하고는‘大丈夫의 이름은 사관史官이 冊에 記錄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데, 苟且하게도 山속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億萬年을 傳하려 한다’고 一喝했습니다.

旅行地에서 懷抱를 푸는 것도 우리 旅行 文化의 傳統에 該當됩니다 오늘날과 差異리면 淺薄하지 않게,格에 맞게 즐기는 風流를 通해 感興을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빼어난 風景을 앞에 두고 詩 한 首 짓지 못하면 제대로 된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낯선 世界를 온몸으로 體得하다

朝鮮時代 旅行客 亦是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낯선 對象에 對한 好奇心이 뜨거웠습니다. 18世紀 湛軒 洪大容이 한글로 쓴 베이징 探訪 記錄인 乙丙燕行錄에는 난생 처음 海外旅行을 떠난 이의 마음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洪大容은 서른다섯이던 英祖 41年(1765) 漢陽을 出發해 170余日 동안 平壤,義州,遙東을 지나 北京을 다녀옵니다. 燕行을 꿈꾸며 일찍이 譯官에게 中國語를 익힌 그는 北京에 머무는 동안 淸니라 學者들과 사귀며 交流했습니다. 또 가톨릭 聖堂을 찾아가 獨逸人 宣敎師와 筆談을 나누며 建築 樣式,畵法, 天文圖,自鳴鐘,望遠鏡 等 西洋 文物에 對해 旺盛한 知的 好奇心을 나타냈습니다. 이미 뛰어 난 거문고 演奏者였던 湛軒은 西洋 樂器인 파이프오르간의 演奏法을 卽席에서 把握해 試演하기도 했습니다.

偏見과 排斥 없이 새로운 文物과 思想을 考察,收容하려는 態度는 洪大容의 一生을 貫通하는 價値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當代 最高의 科學 發明家이자 實學思想家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젊은 時節 體驗한 旅行이 한 사람의 一生은 勿論 그가 속한 共同體와 後代에까지 影響을 끼친 것입니다. 朝鮮時代 最高의 紀行文集으로 評價 받는 熱河日記의 主人公 燕巖 朴趾源을 비롯해 北學派의 泰頭인 朴齊家,秋史 金正喜가 같은 例입니다. 仙人들의 旅行은 自身을 形成하고 世上을 變化시키는 힘의 發源地였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