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애국지사의 노래-장전진///不滅의 安重根 義士

bsk5865 2013. 11. 19. 08:45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1.19 06:37

 

애국지사의 노래-장전진///不滅의 安重根 義士(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4354 


애국지사의 노래-장전진


애국지사의 노래-장전진

작사 작곡 미상


양자강 깊은 물에 낚시 드리고
독립의 시절 낚던 애국지사들
한숨과 눈물로 물 들린 타향
아침 꽃 저녁 달이 몇 번이더냐


가슴에 맺힌 한을 풀 길리 없어
산 설고 물 선 땅에 수십 년 세월
목숨이 시들어 진 토가 된들
배달민족 품은 뜻을 버릴까 보냐


의분과 인내 속에 강은 더 흘러
내일의 기쁜 날을 맞이 하려는
자유와 독립의 힘찬 종소리
무궁화 삼천리에 울려 퍼지리


不滅의 安重根 義士

어제가 安重根 義士가 殉國한지 100周年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00年前 1910年 3月 26日 旅順監獄에는 봄비가 내렸습니다. 安 義士는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程度로 食事와 睡眠이 平素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故鄕에서 새로 지어 보낸 흰 明紬 두루마기와 검은 洋服바지에 우리나라 신을 신고 刑場으로 向했습니다. 檢察官, 典獄, 通譯官, 書記 等이 絞首臺 前面의 檢視室에 앉았습니다. 典獄 栗原(くりはら)가 死刑執行文을 朗讀한 後 園木(そのき)가 通譯했습니다. 遺言이 없느냐는 물음에 安 義士는 對答했습니다.

"나의 行動은 本始 東洋平和를 爲함인 卽 다시 할말 없으나 다만 여기 모여선 日本 官憲은 以後 韓日親善과 東洋平和에 盡力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後 3分間 祈禱를 마치고 卽時 잠잠히 刑臺에 올라 '東洋平和 萬歲'를 외치고 儼然히 執行을 當하니 곧 10時 4分이라. 11分을 지낸 後 絶命되었는데 醫師가 屍體를 檢査한 後 棺에 넣고 禹德淳•曺道先•劉東夏에게 作別케 하니 3人이 다 悵然히 절을 하여 弔喪하는 뜻을 表하는 中 禹德淳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고…."

安 義士의 最後는 大連에서 發行되던 '滿洲日日新聞'이 가장 生生하게 記錄했스니다. 이 新聞은 日帝 南滿洲鐵道株式會社의 機關紙였지만, 安 義士를 尊敬하는 態度를 잃지 않는 記事를 실었습니다. 3月 26日字 '最後의 面會' 記事는 安 義士가 24日 獄中 面會室에서 定根•恭根 두 아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事實과 함께 安 義士의 寫眞, 獄中 揮毫(一勤天下無難事•부지런하면 天下에 어려운 것이 없다)를 곁들여 大部分의 紙面을 割愛했습니다. 27日字 社會面 머리記事 '安重根의 最後'는 死刑執行의 詳細한 報道였습니다. 安 義士가 通譯 園木에게 써 준 揮毫(通情明白光照世界)도 실었습니다. '疏通을 明白히 하면 世上이 밝아질 것'이라는 意味라 할 수 있습니다. 3月 31日字는 死刑 10分 前에 撮影했다는 흰 두루마기 차림의 모습〈寫眞〉과 함께, '安重根事件 公判速記錄'을 發賣한다는 '社告'를 실었습니다.

安 義士의 遺骸는 松板으로 새로 짠 寢棺(屍身을 누인 狀態로 安置하는 긴 棺)에 安置했습니다. 死刑囚의 遺骸는 普通 허름한 棺에 넣었지만, 案 義士의 遺骸는 特別히 鄭重하게 모신 것입니다.(滿洲日日新聞, 3.27., '安重根의 最後') 그러나 遺骸는 두 아우의 要求를 默殺하고 韓國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本國으로 돌아가면 人心을 刺戟하여 過激한 反日運動이 일어날 것을 憂慮했던 것입니다.

國內 新聞 가운데는 프랑스 神父 드망주(安世華)가 發行人이었던 天主敎의 '京鄕新聞'(週刊)이 比較的 詳細하게 報道했습니다. 그러나 大韓每日申報는 아주 짧은 事實 報道에 그쳤습니다. 警視廳이 安 義士 殉國 報道를 統制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日本人 發行의 日語新聞 '朝鮮申報'(仁川)와 '京城新聞'(서울)은 아예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安 義士 殉國 後 寫眞을 간직하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얼굴을 넣은 葉書 '忠臣 安重根'이 나돌았고, 寫眞을 사려는 사람이 寫眞館에 줄을 잇자 警視廳은 治安妨害라는 口實로 이를 禁止시켰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