鐘の鳴る丘(とんがり帽子)-川田正子 作詞 菊田一夫 作曲 古関裕而
一 緑の丘の赤い屋根 とんがり帽子の時計台 鐘が鳴ります キンコンカン メーメー小山羊(こやぎ)も啼(な)いてます 風がそよそよ丘の家 黄色いお窓はおいらの家よ
二 緑の丘の麦畑 おいらが一人でいる時に 鐘が鳴ります キンコンカン 鳴る鳴る鐘は父母(ちちはは)の 元気でいろよという声よ 口笛吹いておいらは元気
三 帽子の時計台 夜になったら星が出る 鐘が鳴ります キンコンカン おいらはかえる屋根の下 父さん母さんいないけど 丘のあの窓おいらの家よ
四 おやすみなさい 空の星 おやすみなさい 仲間たち 鐘が鳴ります キンコンカン 昨日にまさる今日よりも あしたはもっとしあわせに みんな仲よくおやすみなさい
歌の背景 太平洋戦争 末期 日本의 主要都市 大部分이 美軍의 空襲을 받았습니다만, 特히 首都 東京는 被害가 極甚하여, 大部分이 불탄 들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1945年(昭和20年) 8月 15日, 敗戰으로 戰爭이 끝나면서, 空襲으로 집도 父母도 잃은「戦災孤児」들이 거리에 넘쳤습니다. 保護施設에 収容되지 않았던 孤児들의 相當數는, 地下道나 防空壕 等에서 자고, 낮에는 쓰레기 줍기나 구두닦이,밥 동량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을「浮浪児」라고 불렸습니다.
浮浪児 속에는, 날치기나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橫行하고 있는 靑少年의 날치기나 도둑과는 달리, 그들은 糊口之策으로 生命을 잇기 爲한 어쩔 수 없는 行動이었습니다. 꾸짖어야 할 것은, 無謀한 戰爭으로 國民을 塗炭의 괴로움으로 몰고 간 政治指導者들의 어리석은 行動이지요.
施設에 収容된 孤児들도, 그렇다고 平穏한 것은 아이었습니다. 一般社会에서도 餓死者가 続出하던 時代였기 때문에, 飮食도 充分치 못하고, 虐待나 괴롭힘도 있었습니다. 社会全体가 混乱하였으니깐요.
菊田一夫(きくたかずお) 作의 NHK 라디오 드라마「鐘の鳴る丘」는, 이러한 社会情勢를 背景으로 1947年(昭和22年) 7月에 始作했습니다. 以後 3年 半, 600回에 걸쳐 放送되어 古関裕而 作曲의 主題歌「とんがり帽子」과 함께 大 流行했습니다. 1948年(昭和23年)에는, 松竹에 依해서 映画化되어 全部 3個가 만들어졌습니다.
드라마는, 戰爭이 끝나고, 復員되어 돌아온 젊은이• 加賀美修平가 길가에서 浮浪児들에게 가방을 빼앗기는 것으로부터 始作됩니다. 그 浮浪児는 隆太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修平는, 隆太와 그의 친구 修吉, ガンちゃん, クロ, みどり等과 交流하게 됩니다.
그들의 悲慘한 事實을 알게 된 修平는,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浮浪兒들도 그를 그리워하며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修平의 故郷인 信州 山間에, 孤兒들과 힘을 合해 「少年の家」를 만들어, 共同生活 를 始作합니다……
当時에는, 日本 안의 어린이들이, 이 드라마를 빠뜨리지 않고 모두가 듣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만이 안이고 敗戰으로 거듭되는 괴로운 生活에 意氣銷沈해지고 있던 어른들도, 이 드라마에 依해서, 내일에의 希望을 찾았다고 합니다.
菊田一夫는, 戰爭中, 岩手県의 江刺市 岩谷堂에 家族을 避難 시키고 있었습니다. 여기의 洞事務所에는 鐘이 걸린 높은 高楼가 있어, 菊田一夫는 그것을 보고「鐘の鳴る丘」을 発想했다고 합니다. 이 建物은, 明治記念館으로 保存되고 있어 現在도, 每日 午前 7時와 午後 5時에「とんがり帽子」의 멜로디가 흐르고 있습니다.
또, 映画에서는, 長野県 南安曇郡 穂高(ほたか)町)(現在는 安曇野市穂高)에 있던 靑少年의 更生施設「有明(ありあけ)高原寮」는 모델이 되어 있습니다.
現在 같은 場所에 세워져 있는 鉄筋의「有明高原寮」는, 亦是 青少年의 更生施設 입니다만, 「鐘の鳴る丘」의 모델이 된 建物과는 다릅니다. 모델이 된 時計塔의 舊 建物은, 1980年(昭和55年)에 約 昭和55年 600미터 떨어진 場所에 移築•復元되어「鐘の鳴る丘集会場」이라고 하는 靑少年의 合宿 訓練施設이 되었습니다.
그 江을 건너면 絶壁밑에 샘이 있어, 近處의 세탁을 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上流에 댐이 생겨, 江이 마르고, 샘이나 벚꽃나무도 사라졌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