この道-大貫妙子 作詞 北原白秋 作曲 山田耕筰
一 この道はいつか来た道 ああ そうだよ あかしやの花が咲いてる
二 あの丘はいつか見た丘 ああ そうだよ ほら 白い時計台だよ
三 この道はいつか来た道 ああ そうだよ お母さまと馬車で行ったよ
四 あの雲もいつか見た雲 ああ そうだよ 山査子(さんざし)の枝も垂れてる
歌の背景 이 노래는 1930年(昭和5年) 発行「世界音楽全集11巻(日本童謡曲集)」에 採録된 노래입니다. 「ああ そうだよ」의「ああ」는「あ~あ」로 올려 노래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原譜보다 많이 늘리는 것으로 했습니다만, 神經이 쓰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카시아, 時計塔이 나오면, 이것은 札幌의 이미지이지요. 아카시아나 山査子(薔薇科)가 피어, 時計塔에 서면 언덕이 보이는 길을 馬車를 타고 가는 追憶이 테마로 되어 있습니다.
이 馬車가 自家用 馬車인가 乘合 馬車인가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달라집니다. 登場 人物은 좋은 집의 母子라고 하는 느낌입니다만, 그런데도 自家用 馬車는 아닐 것입니다. 馬車의 保有에 加勢하고, 馬夫를 常時 雇傭 할 수 있을 만큼 裕福한 집은, 華族이나 政府 高官, 豪商의 一部에 限定되어, 乘合 馬車를 타는 것 조차, 하나의 奢侈라고 생각되고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馬車 自体는 古代로부터 使用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乘合 馬車라고 하는 Business에 最初로 應用한 것은, 17 世紀 프랑스의 哲學者 파스칼이었다고 합니다. 1662年에 파리 市內에서의 營業이 許可되었습니다만, 運賃이 高價여서, 短期間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西欧에서 乗合 馬車의 営業이 本格的으로 始作된 것은, 工業化에 隨伴하는 都市 人口의 膨脹이 눈에 띄게 많아진 18 世紀 前半 以後의 일입니다.
한便, 日本에 乗合 馬車가 出現한 것은, 1869年(明治2年) 2月의 일입니다. 란간과 죠지라고 하는 美國人이 東京・横浜 사이를 달리게 한 것이 最初로. 이 乗合 馬車는 外国公館의 連絡用으로 開設된 것이었지만, 日本人을 便乘 시키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같은 해의 5月, 下岡蓮杖(しもおか・れんじょう) 等 日本人 商人이 共同으로 出資하여 設立한 成駒屋가 京浜間에서 乗合 馬車의 営業을 開始했습니다. 이것을 機會로, 全國에 乘合 馬車가 普及되어 갔습니다.
西欧의 乗合 馬車는 2마리가 끄는데 美國의 駅馬車는 6마리 끄는 것이 一般的이었습니다만, 日本의 乘合 馬車는 大部分이 1마리가 끌고, 2마리가 끄는 境遇는 長距離 路線이나 乘客이 많은 路線으로 限定되었습니다. 定員은 6~8名 程度로, 馬夫가 불어 울리는 나팔의 소리를 記念하여 토테 馬車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大正末期의 伊豆를 舞台로 한 井上靖의 自伝的小説「しろばんば」에, 다음과 같은 記述이 있습니다.
이날 아침의 乘客은, 고작, 바느질 하는 할머니 外는, 近處 部落에 가는 마을의 男子들 두 사람만이었습니다. 定員 여섯 名의 마차이기 때문에, 세 名이라면 천천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으로, 餞送하러 나온 近處의 内儀(남의 夫人을 높인 말)들은, 自己들과 같이 모두, 좋았어요 하였습니다. 乘客이 여섯 名이 되어 滿員이 되면, 작은 馬車 안은 文字 그대로 무릎이 맞다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거북해집니다.
日本의 첫 公共 輸送機関으로서 貴重한 寶物 乘合 馬車였지만, 市内電車나 鉄道의 普及이 늘어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鉄道 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地方에서는, 그 後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버스의 補給으로 그의 그림자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