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엘레지-고봉산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二 백사장에서 동백 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고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대사 백사장에서 도백 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고 바다 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 번 또 다시 만날 길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三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만날 길 없는데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개항장 객주(客主)의 몰락 "전일에는 지방의 상인으로 경성에 오가는 자가 끊어지지 않더니 금일에는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이 조잔(凋殘)해졌으며 예전에 흥왕하던 객주영업이 무슨 이유로 금일에 부진한가. 생각할지어다. 그 행하는 관습과 그 경영하는 규모가 금일 변천한 이 시대에 적합지 아니한 소이가 아닌가."(황성신문, 1910.7.7.)
지역간 물자 이동의 통로였던 강과 바다의 포구에선 상업이 활발하였다. 경강(한강의 옛 이름)의 각 포구와 전국의 주요 포구마다 객주(客主)가 있었다. 객주란 '객상지주인'(客商之主人), 즉 객상인 선상(船商)과 행상(行商)의 위탁을 받아 매매를 주선하고 구문(口文)을 받는 상인을 말한다. 당시엔 "포구에 주인이 없으면 상인이 오지 않아 물자를 구할 방도가 없으니 포구에 주인이 있어야 함은 일반적인 규정"이었다. 객주는 지방 수령이나 궁방•아문에 연간 일정한 세를 납부하고 대신 특정 거래에 대한 영업권(객주권)을 확보하였다.
개항이 되자 객주 활동의 중심은 개항장으로 바뀌었다. 1889년 부산에 44명, 인천에 60명, 1884년 원산에 45명 정도의 객주가 있었다 한다. 개항 초기엔 통상조약에 의해 외국 상인들의 활동 반경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개항장의 일본상인은 "객주, 즉 한인 도매상의 중개를 거치는 것이 상례였다('통상휘찬')." 정부는 재정 보충을 위해 세금 상납을 조건으로 특정인에게 객주 영업을 허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것이 원산상회소(1883년)를 비롯한 각 개항장의 객주상회사였다. 객주상회사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조직이며 여기에 소속되지 않은 자는 매매 주선을 할 수 없었다.
일본상인은 이러한 영업독점에 대해 항의하였고 결국 갑오개혁 이후 객주상회사의 특권은 점차 혁파되었다. 그러나 특권 해체라는 정부의 방침과는 달리 영업독점권을 가진 상회사는 이후에도 각처에서 설립되었다.
객주허가권을 장악한 채 더 많은 수입을 얻으려 하는 내장원(황실재산 관리부처)의 이해와 지방관의 수탈 및 외국상인들의 세력 확대에 맞서야 하는 객주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899년에 개항돼 쌀 수출항으로 떠오른 군산항〈왼쪽 사진〉에도 객주상회사〈오른쪽 사진〉가 설립되었다. 특권적 객주와 그렇지 못한 객주 간의 갈등 속에서 상회사는 영흥사, 창성사, 군산신상(紳商)회사, 군산객주상회사, 객주조합소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설립과 혁파를 반복하였다. 군산 인근의 줄포에서는 자유영업을 하는 객주와 특권적 객주 간에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다.
"전북 부안군 줄포 등지에 거하는 자본가 등이 협의하여 여각(旅閣)조합소를 설립하고 객주 영업하는데, 전에 허가권으로 객주 하던 아무개 몇 명이 방해하는 고로 조합원들이 수일 전에 농상공부에 연명 청원하여 그들의 저해하는 것을 금해 달라 하였더니 농상공부에서 재작일 전북 관찰사에게 금집(禁輯)훈령을 발송하였다더라."(황성신문, 1909.7.22.)
객주상회사는 특권을 가진 상인조합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넘어 근대적 상업회사로 성장하지 못했다. 결국 최대의 미곡 수출항이 된 군산에서 상업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일본상인이었다. 특권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개항장 객주는 역사의 무대에서 시나브로 사라지고 소수는 식민지 상업체계로 편입되고 말았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