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백마강-박경원 작사 조명식 작곡 조명암
一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二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찟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强한 團結力 誇示한 補負商 상설점포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행상은 상품유통의 주된 담당자였다. 행상은 부상과 보상으로 나누어진다. 부상은 소금 미역 물고기 토기(土器) 목기(木物) 생수철(生水鐵) 등과 같이 무겁거나 부피가 크면서 값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를 말하며, 보상은 직물 장신구 종이 등과 같이 부피가 작고 가벼우며 비교적 비싼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는 봇짐장수를 말한다.
충남 부여 등지의 보상단과 부상단, 홍성의 보상단, 예산의 보상단〈큰 사진〉(예산 보상단의 조직과 기능을 기록한 '예산임방절목'), 경북 고령의 부상단, 창녕의 보상단에 관한 문서가 남아 있다. 이 중 부여의 보상단은 1845년에, 홍성과 예산의 보상단은 1851년에 창설되었음이 확인된다.
보부상 조직을 보면, 일반적으로 수개의 군현을 관할 범위로 하고 관할지역의 각 장시에 있는 임소(任所)마다 본방(本房) 1인을 선출하여 임소의 사무를 맡겼으며, 본방 중에서 접장(接長)〈작은 사진〉(맨 오른쪽이 접장의 직인)을 선출하여 상단의 사무를 관장하고 상단을 대표하게 하였다.
보부상단은 대내적으로는 질병이나 사망의 경우에 상호 부조하고 상도의와 단원간 예의, 신의성실에 관한 엄격한 규율을 실행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관의 공인을 얻어 부패관리의 수탈과 토호•객주의 횡포에 대응하였다.
개항기에 보부상은 정부의 상업관리정책과 압력단체로 활용하려는 목적에 따라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여기에 가담하는 보부상이 차츰 증가하여 1908년 말 결성된 대한상무조합의 장부상 인원은 73만여명이었다. 이후 전국적 조직의 해체로 상단 가입자가 줄었고, 교통통신의 발달과 상설점포의 성장으로 행상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
일본 조동종 승려로 조선 병탄에 깊이 관여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는 1910년 4월에 쓴 '부보상고(負褓商考)'에서 "보부상이 화적•폭도의 무리에 들어갈 우려가 있고 점차 그들 취급 상품의 구매력이 줄고 외국상인에 압도당하면 반드시 나라에 해악이 될 것이므로, 사적인 세력경쟁에 제공되는 이들의 단체를 빨리 해산하여 독이 퍼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방과 더불어 내려진 집회 단속령에 의해 강력한 중앙조직을 창출하려는 보부상의 노력은 결국 봉쇄당하고 지방의 상단 세력은 위축되었다.
그래도 합방 무렵 시장과 포구에는 보부상이 아니면 만사에 불편이 많았기 때문에 상업계에서 보부상은 여전히 지난날의 세력을 잃지 않았다('조선산업지'). 수명 또는 수십명이 대오를 이루어 행상하는 보부상이 1930년대 후반, 전 조선에 1만~1만5000명 존재했다.
보부상 출신으로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는 남강 이승훈이 대표적이다. 남강은 15세이던 1878년 결혼한 후 유기행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게에 숟가락을 지고 납청 주변의 장시를 순회하다가, 얼마 후에는 황해도 서울 등지로 판로를 개척하였다.
원격지로 행상하게 되면서 지게를 나귀로 바꾸고 나중에는 우차(牛車)를 이용하게 되었다. 또 박승직은 행상으로 닦은 기반으로 포목점 박승직 상점을 열었고 이는 훗날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