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아 도는 내력-남배송 작사 손로원 작곡 이재호
一 벼슬도 좋다 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땅 언덕 위에 초가 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 삼을 메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물방아 도는 내력 알아보련다
二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냇가에 다리를 놓고 고향을 잃은 길손 건너게 하며 봄이면 버들 피리 꺾어 불면서 물방아 도는 내력 알아보련다
高宗密書를 特種 報道한 英國 記者 런던의 일간 '트리뷴'(Tribune) 기자인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는 1906년 1월 초 서울에 왔다. 을사늑약 이듬해였고 통감부가 설치되기 직전이었다. 궁중에는 고종을 감시하는 정탐꾼들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스토리는 고종의 측근이 한복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온 밀서를 전달받았다. 붉은 옥새가 찍힌 밀서는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은 황제가 조인하거나 동의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내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 한국 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 보호 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일본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아주고 중립화를 보장해 달라는 외교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밀서〈왼쪽 사진〉는 1906년 1월 29일자로 작성되었다. 스토리는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나와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선적의 배를 타고 2월 7일 가까스로 중국 즈푸(芝��)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밀서의 내용과 자신이 취재한 한국의 실정을 기사로 작성하여 런던 본사에 송고했다. 또한 즈푸 주재 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O'Brien Butler)를 찾아가서 북경주재 영국대사에게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북경 주재 영국 공사 사토(Ernest Satow)는 영국 외무성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제2회 영일(英日) 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스토리가 타전한 첫 기사는 트리뷴지 2월 8일자 3면 머리〈오른쪽 사진〉(논란이 일자 같은 내용을 다시 보도한 12월 1일자 지면)에 게재됐다.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이란 제목의 기사는 글 첫머리에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일본 스파이들이 가득 차 있다. 을사늑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고 썼다. 이어 을사늑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하고 고종의 밀서 6개항을 영문으로 번역 게재했다.
스토리의 기사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트리뷴지 기사는 로이터 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에 다시 실렸다. 대한매일신보와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도 한국 황제가 을사보호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밀서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1년 동안 계속되던 논란은 1907년 1월 16일자 신보가 밀서를 사진판으로 실으면서 다시 확산되었다.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했던 일본 외무성과 이토 히로부미는 밀서의 실물이 신문에 실리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보에 실린 밀서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는 밀서의 존재를 부인했다. '고종은 밀서를 수교한 일이 없으며, 이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우의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만들어 한국 정부의 '관보'(1907.1.21.)에 게재했다. 이와 함께 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폐간하여 배설이 반일 활동을 못하도록 하고 그를 추방하려는 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