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고사랑-박재홍 작고 고려성 자곡 김교성
一 호동왕자 말채쭉은 충성 충자요 모란공주 주사위는 사랑애잘세 충성이냐 사랑이냐 쌍 갈래 가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별도 흐리네
二 자명고를 찢고서야 웃어본 공주 승전고를 듣고서야 울어본 왕자 사랑 팔아 충성을 산 호동의 가슴 울어봐도 웃어봐도 모란은 없네
三 공주님에 무덤 위에 피는 꽃 잎은 왕자님에 가슴 속을 헤치는 원한 팔 척 장검 돌려 잡고 노리는 별은 일편단심 매듭 지는 직녀성일세
국가 재정을 도운 京江 상인 "오강은 동쪽으로 서울에, 서쪽으로는 한강에 이어져 지리(地利)에 풍부한 결과 고래로부터 유명한 물화집산지이다. 곡물은 가까이 경기•황해•충청의 각도로부터 멀리는 전라남북 양도로부터 집중하여 그 수가 1년 60만석에 달한다. 소금은 남양지방 연안 일대로부터 집중하여 1년 25만석에 이른다. 기타 땔감, 어류 등도 적지 아니하여 서울 방면의 수요를 충족한다. 그래서 그 상업이 극히 번성하고 선박이 날로 폭주하여 서울의 물가는 이곳 상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조선후기 서울시장이 성장하자 경강포구의 상업이 발달했다. 경강(京江)이란 한강 중에서 한성부가 관할하는 광나루부터 양화진까지의 물줄기를 말한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남산 남쪽 일대부터 노량까지를 한강, 노량 서쪽부터 마포까지를 용산강, 마포 서쪽부터 양화나루까지를 서강이라 하여 통틀어 3강이라 불렀다. 3강은 서울로 물자가 이입되는 주된 통로였다. 18세기 중엽에는 5강의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3강에 뚝섬 근처와 송파나루 근처를 합하여 부르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대에 이르면 경강을 8강이라 불렀다.
경강의 포구는 각기 특성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는데, 용산에는 정부의 창고가 집중되어 전국에서 조세로 거둔 곡물이 모였다. 한강 하류로부터 오는 조세곡은 서강에 많이 모였다. 마포〈사진〉는 한강 하류로부터 오는 어물과 상품의 최대 집산지였다. 송파는 18세기 이래 한강 상류, 서북지방 및 삼남으로부터 수륙으로 서울로 수송되는 상품의 집산지로서 번창하였다. 목재와 땔감은 뚝섬에 주로 모였다. '19세기 초 경강에는 각지에서 모여드는 상선이 해마다 1만척을 헤아렸다'는 기록이 있다.('비변사등록', 순조 17년 3월 25일)
경강상인의 중심 세력은 위탁매매를 주 업무로 삼는 객주였다. 경강상인의 재력은 대단했다. 1833년 경강 동막의 객주 김재순(金在純)은 경강의 미곡상인을 통제하고 서울 시전과 화응하여 쌀값을 올렸다. 이 때문에 쌀을 구하지 못한 서울 주민이 쌀가게와 한강변 쌀 창고에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켰다. '황성신문' 1905년 2월 15일자에는 이런 기사도 나온다.
"연강거민(沿江居民) 고순제(高順哉) 한덕경(韓悳敬)씨 등 20여인이 근일 국고의 재정이 곤궁하야 외국에 차관하려 함을 듣고 애국심이 분발하야 800만원(元)을 국고에 수납하니 외국에 차관계약은 하지 마라 하얏다니, 우리나라 4천년 이래 전국인민 중에 국가 곤궁을 위 하야 이러한 거액을 자원함은 처음 있는 일이니 두 사람의 의혈충분을 어찌 기리지 않으리오."
조세를 상업자금으로 융통하던 경강상인은 1905년 조세를 중앙금고에 납입하게 된 뒤부터는 자금 결핍에 시달리게 된다. 또 경부철도와 경의철도가 개통된 뒤 한강 수운은 점차 철도 운송에 밀리게 된다. 1911년 철도편으로 서울에 들어오는 쌀(26만여석)이 한강을 통한 공급량(22만석)을 넘어섰다. 철도유통은 일본상인이 장악하였다. 이로 인해 경강상인의 시장 지배력도 차츰 일본상인에 침식되게 된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