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공주의 비련-금사향///宮禁令으로 幽閉된 皇帝 高宗

bsk5865 2014. 5. 1. 19:56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5.01 05:45

 

공주의 비련-금사향///宮禁令으로 幽閉된 皇帝 高宗(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4971 


공주의 비련-금사향


공주의 비련-금사향

작사 강남풍 작곡 전오승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
그대 따라 가리라 기약했더니
이다지도 세상은 말이 많은가
아~ 공주 몸이 원망스럽소


씌워진 의무이라 난들 어이하리오
부질없이 님 가슴에 불을 놓고서
못 이루는 이 사랑 원망을 마오
아~ 이내 순정 무너만 진다


宮禁令으로 幽閉된 皇帝 高宗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1월 서울에 왔던 영국 트리뷴(Tribune)신문 특파원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는 고종의 처지를 '유폐된 황제'(The Captive Emperor, 트리뷴, 1906.2.8 및 12.1)로 묘사했다. 고종은 일본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스토리 기자는 "고종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본 정보원들은 세계에서도 가장 민완하다"고 폭로하고, 같은 내용을 '동양의 내일'이라는 자신의 저서('Tomorrow in the East', Chapman & Hall, 1907)에도 담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부임한 후 한국의 황실과 행정부를 철저히 장악했다. 그는 1906년 7월 2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궁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 병력을 궁중에 주둔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강변했지만 고종의 주변을 차단하고 고립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고종은 한참 동안 저항하며 거절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주한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이 본국 외상 에드워드 그레이에게 보낸 보고(1906.7.9)에 기록하고 있다. 이날 저녁 일본 순사와 헌병이 전격적으로 궁내에 진주해 궁문을 봉쇄하고 궁중 내시를 비롯한 직원의 출입을 통제했다.

궁내부 대신 이재극(李載克)은 7월 6일자로 '궁금령(宮禁令)'을 제정 공포하여 통감부의 불법적인 강압을 뒷받침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중에 출입하려면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어야 한다는 요지였다. 궁금령은 배설과 헐버트 같은 반일적인 외국인이 고종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조치이기도 했다.

고종은 이제 통감부의 허락 없이는 관리들조차 마음 놓고 만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궁금령 공포 직후인 7월 16일 예식경(禮式卿) 이용태(李容泰)가 대궐에 들어오려다가 파수 순검이 궁문표(宮門票)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법부의 조사와 처벌을 받았다. 예식경은 한말 관료의 최고 직제에 해당하는 칙임관(勅任官) 벼슬이었다. 9월 10일에는 육군 참장(參將) 김영진(金永桭)도 궁문에 들어왔다가 궁금령 위반으로 육군법원에 체포되었다.

통감부가 설치되기 훨씬 전에 일본의 화보 잡지 '풍속화보'(1895.1.25)에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고종과 왕비를 알현하는 그림이 실렸다. 한성순보 창간에 참여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한성내잔몽'(漢城内殘夢,'서울에 남겨둔 꿈'으로 번역됨)과 '한정개혁기문(韓廷改革紀聞)'이란 글에 곁들인 이 그림은 일본 공사가 조선의 미몽을 깨고 개혁을 단행하도록 그 단서를 열어주었다고 자찬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같은 그림이 9년 뒤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때 영국의 화보 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1904.3.20)에 '일본의 한국 점령'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 화가의 그림'으로 소개되었다. 영국 잡지의 그림〈사진〉은 '풍속화보'의 원화를 옮겨 실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비교하면 전재가 아니라 모사(模寫) 그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같은 그림에서 영국인들은 일본의 압박을 받는 '유폐된 황제'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