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농군-최정자
작사 김일영 작곡 이철혁
一
홀 어머니 내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인 데
이 몸이 처녀라고 이 몸이 처녀라고
남자일을 못하나요
소 몰고 논 밭으로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二
홀로 계신 우리 엄마
내 모시고 사는 세상
이 몸이 여자라고 이 몸이 여자라고
남자일을 못하나요
꼴 망태 등에 메고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嚴貴妃가 세운 進明 淑明 養正學校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等女學校)에서 4월 5일에 졸업예식을 설행한다고 하는데 황귀비(皇貴妃) 전하께서 설연비(設宴費) 수백환을 하사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25일 잡보란에 '숙명학교 졸업'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소식이다. 그리고 이해 4월 12일 대한매일신보는 학계소식을 전하면서 숙명고등여학교의 졸업식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숙명여학교의 첫 졸업생은 김수정•김정희•김보경•이상정 등 4인이다.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이 출연금을 기부하기도 하고 연필과 공책 등 물품을 기부했다고 그 내역을 세세히 소개하고 있다.
숙명고등여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06년이다. 고종의 계비(繼妃)였던 황귀비(皇貴妃) 엄씨(嚴氏)〈왼쪽 사진〉가 여성의 신교육을 목표로 세운 것이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이다. 명신여학교는 한성부 박동(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용동궁 480평 대지에 지은 75칸의 한옥에서 5명의 양반가 딸들을 첫 학생으로 받아들여 1906년 5월 22일 개교했다. 정경부인 이정숙(李貞淑)씨가 최초로 여성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일본인 여성학감 후치자와 요시에(淵澤能惠)가 학교 운영을 도왔다. 모든 경비는 조선 황실의 보조금으로 충당했다. 1909년 학교명을 '숙명고등여학교'로 바꾸고, 1910년 4월 드디어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한 것이다. 숙명고등여학교는 일제강점 직후인 1912년 경선궁과 영친왕궁으로부터 하사받은 황해도•경기도•전라남도 일대의 농경지 1천여 정보를 기본재산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여성교육을 지속하였다.
귀비 엄씨는 공식적으로는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1854~1911)로 칭한다.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다가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어 황태자 은(垠•의민태자)을 낳았으며 귀비(貴妃)로 책봉되어 중궁전의 주인이 되었다. 엄귀비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에 크게 자극을 받아 한국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 건립에 뜻을 두었다. 그리고 1906년 4월에는 진명(進明)여학교〈오른쪽 사진〉를, 5월에는 명신(明信)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어 양정의숙(養正義塾)도 세웠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 세 학교를 양반학교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아예 귀족여학교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진명여학교는 여성교육 기관이면서도 서양식 교육을 지향하게 하였고, 명신여학교는 귀족 여학교를 표방하여 귀족층의 영양(令孃)들을 학교로 받아들였다. 양정의숙은 한국 전통을 계승하는 여성 교육기관으로 육성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이다.
귀비 엄씨는 학교 설립 후 학교 교육과 운영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궁에서 하사하였고,학교 안에 기숙사를 만들어 일체의 비용을 학교에서 부담했다. 특히 궁내의 내인들도 숙명여학교에 입학하여 통학하게 해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귀비 엄씨가 세운 진명•숙명•양정학교는 근대 민족교육의 산실로서 오늘날까지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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