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춘몽-황금심
작사 조명암 작곡 김해송
一
꽃다운 이팔청춘 눈물이 왠 말이며
알뜰한 첫사랑에 이별이 왠 말이냐
얼룩진 분단장을 다듬는 얼굴 위에
모질게 짓밟히는 낙화신세
이름마저 기생이냐 누구의 죄더냐
二
술 취한 사람한테 주정도 받았으며
돈 많은 사람한테 괄세도 받았다오
밤 늦은 자동차에 지친 몸을 싣고
뜨거운 두 뺨에 흘린 눈물
천한 것이 기생이냐 직업이 원수다
變化에 抵抗한 兩班의 沒落
중국 고대에 성립한 사농공상(士農工商)제를 조선과 일본의 전근대사회도 받아들였다. 중국 고대 은주시대에 '사'는 무사였으나, 전국시대부터 학문을 하는 독서인을 지칭하게 되었다. 조선의 국가체제에서 선비인 '사'는 독서하는 문인인 반면, 일본 무가(武家)사회에서 '사'는 무사인 사무라이였다. 조선에서는 사로부터 양반층이 나왔다.
양반이란 원래 문무반직(文武班職)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였지만, 고려후기부터 점차 그 가족이나 가문까지 포괄하는 용례로 전환되고, 조선중기에 세습적 특권신분층을 지칭하게 되었다. 양반〈사진〉(출처=에밀 부르다레,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글항아리)은 문과를 통한 관직 진출을 독점하고 군역(軍役) 부담에서 면제되고 사법적으로도 혜택을 누렸다.
조선후기 대동법, 균역법 및 호포법은 조세제도상에서 양반층의 특권을 약화시켰다. 나아가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양반의 제도적 특권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개항 전에는 상인이 되면 양반 행세를 할 수 없었으나, 개항 직후 통상 장려책으로 양반의 상업 종사가 허용되고, 고종은 양반이 아닌 관료층을 늘렸다.
양반제에 대한 비판론이 개항 전에는 일부 실학자에 국한되었으나, 개항 후에는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대세가 되었다. 예를 들면, '황성신문' 1906년 11월 28일자 '전국 양반에 경고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부패한 병세를 탐구"하면 "양반의 완고한 고질"에 기인한다고 단언하였다. 양반이 특권에 의거하여 관직을 독점함으로써 인재가 끊어지고, 양반이 생업에 종사하지 않은 채 수탈을 일삼고, 상공업이 천시되어 재산이 없어지고, 양반가의 젊은 과부가 재혼을 못해 인종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강제합병 이후 양반의 사회적 지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권력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양반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을 부랑자로 취급하고 단속하였다.
양반제가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기에 양반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던가. 경북 예천 맛질 박씨가 일기의 1909년 1월 10일자에 의하면, "대저 을사조약 이후 양반과 아전은 살해당했다고 할 수 있고 궁민과 평민은 때를 만났다. 동네 상놈들이 양반이라 칭하고 옛 칭호를 끊어버린다. 다투게 되면 자네나 군이라 부르니, 그래도 법이 어찌할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전남 구례의 유형업(柳瑩業)은 1910년 10월 26일자 일기 '기어(紀語)'에서 "순천 시장 안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 명도 머리를 깎지 않는 사람이 없어 나만 홀로 옛날과 같은 모양이니 이 슬픔을 어찌 말하겠는가"고 했다.
이처럼 양반층은 변화에 대한 저항감이 컸고, 중인층이 양반층보다 근대화의 물결에 더욱 잘 편승하였다. '기어' 1909년 1월 21일자에는 "지금과 같은 세상은 장삿길을 몰라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양반층도 변화하는 시대의 대세를 마냥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박씨가 일기에서 드러나듯이, 20세기에는 누구나 양반이라 자처하게 되었다. 그래도 양반•상민의 차별 의식은 뿌리가 깊어서 20세기 후반까지 혼인 등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다가, 경제발전과 사회의 성숙으로 20세기 말 소멸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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