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옛터-남인수
작사 왕 평 작곡 전수린
一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二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三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닫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국경일
고종은 대한제국의 개국을 선포하면서 국가와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국경일을 제정했다. 황제 탄생일인 음력 7월 25일은 '만수성절(萬壽聖節)', 황태자 탄생일인 음력 2월 8일은 '천추경절(千秋慶節)', 황제 즉위일인 음력 9월 17일은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성계) 등극일인 음력 7월 16일은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로 선포했다. 국경일에는 관청과 학교, 민가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관리들에게 황제의 내탕금(內帑金)이 하사되며, 관청과 학교를 비롯한 각 단체에서 축하연이 열려 경축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제위에 오르면서 국경일은 대폭 조정되었고, 1909년부터는 기준 일자를 음력에서 양력으로 변경하였다. 순종 탄생일인 3월 25일은 '건원절(乾元節)', 8월 14일은 '개국기원절', 순종 즉위 기념일인 8월 27일은 '즉위예식일(卽位禮式日)', 순종이 황위에 올라 종묘사직에 고한 날인 11월 18일은 '묘사서고일(廟社誓告日)'로 선포되었다.
"3월 25일은 건원절이니 우리 대(大)한국 황제 폐하의 탄강(誕降)하옵신 경사로운 날이라. 집집에 국기를 달고, 학교와 각 관아에서 휴업(休業)하야, 성수(聖壽) 만세를 축하하나니라. 한성에서는 아국(我國) 대관과 수다(數多)한 외국인들이 예궐(詣闕)하야, 대황제 폐하께 알현하고 공경하야 축하하나니라. 아등(我等)도 학교에 가서 즐겁게 노래하야 경사로운 날을 축하하리로다." 〈왼쪽 사진〉(1909년 보통학교 국어독본의 건원절 풍경 삽화)
1908년 첫 번째 건원절에는 수만 장의 기념엽서〈오른쪽 사진〉가 발행되었고,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제등(提燈) 행사를 가졌다. 돈화문 밖에 나와 제등 행렬을 맞은 순종에게 몇몇 학생은 태극기를 건네주며 국권 회복을 기원했다. 1909년 건원절에는 총리대신 이완용이 내외국인 2000명을 초대해 성대한 원유회(園遊會•서양식 가든파티)를 개최하는 등 축하 분위기가 여전했다. 1910년 마지막 건원절에도 각급 단체에서 주관한 축하연이 이어졌지만, 국가 차원의 제등 행사나 원유회는 개최되지 않았다. 오히려 축하연에서 친일파들이 폭행당하고, 경축식 참석자들이 헌병에 체포되는 등 불상사가 이어졌다.
"지난 건원절에 국민신보사 사원들이 경축연을 설행(設行)하는데, 그 신문기자 명근동은 무슨 감정이 있었든지 그 사장 최영년과 일진회장 이용구를 무수히 욕을 하고 또 그 신문사 총무 이모를 구타하야 일장풍파가 일어났다더라." "지난 건원절에 신천군에서 그 고을 학도 백여 명과 기타 신사 이하 인민 400~500명이 회동하야 경축식을 거행하고 그날 밤에 또 제등 경축을 행한 후 연설회를 하고 그 고을 군수 김우희씨와 교사 고정화씨가 연설하였는데, 그날 밤 9시에 그 고을 헌병 분견소에서 무슨 사건을 인함인지 고씨를 불러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 4. 1.)
그해 8월 개국기원절과 즉위예식일은 국경일로 휴무하였지만, 축하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3번째 즉위예식일 이틀 후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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