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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장충 단 공원-배호///農協의 前身, 金融組合

bsk5865 2014. 5. 22. 08:03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5.22 06:33

소담 엔카 | 2189 안개 낀 장충 단 공원-배호////農協의 前身, 金融組合(D) - Daum 카페


안개 낀 장충 단 공원-배호


안개 낀 장충 단 공원-배호

작사 최치수 작곡 배상태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農協의 前身, 金融組合

제1차 한일협약(1904)에 따라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目賀田種太郞)는 금융기관의 확충에 나섰다. 1906년 전국 주요 도시 11곳에 농공은행을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소액금융•농사개량•화폐정리사업을 돕기 위한 금융조합을 설립하였다.

1907년 5월 지방금융조합규칙과 금융조합 설립에 관한 탁지부 대신의 훈령이 발표되자 광주 재무고문지부 재무관 이노우에(井上雅二)는 금융조합 설립에 착수한다. 1000명 이상의 조합원이 모집되어 그해 8월 24일 전남관찰부 관아에서 각 군수와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최초의 금융조합 창립총회가 열렸다. 관찰사 김규창은 개회사에서 "각지에 농공은행과 어음조합이 설립되었으나 은택이 빈곤한 세민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유감이었는데, 이제 금융조합이 설립되었으니 정부의 은덕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과보고에 나선 이노우에는 "대부금을 먹고 마시고 사치하는 데 남용하고 생업에 힘쓰지 않는 것이 발각되면 바로 상환을 명할 것이지만 열심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자에게는 무담보로 대여할 것이며, 그 금액은 1인 40~50원이며 이율은 보통의 이율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어 조합장에 선출된 최상진〈오른쪽 사진〉은 "정부의 은덕이 시골 세민에게 미침이 이와 같으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비록 배운 것 없고 지식이 얕으나 조합장으로 뽑아주었으니 성의를 다하겠다"고 하였다(조선금융조합사).

메가타는 식민지 행정관리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동양협회전문학교 출신 자국인 30명을 경성으로 불러 매일 부기와 조선어를 공부하도록 하였다. 약관을 막 넘긴 이들이 조합의 실질 책임자인 이사로 임명될 자들이며 식민통치의 첨병이었다. 광주금융조합〈왼쪽 사진〉 이사 오쿠다(奧田種彦)도 그중 한 명이었다.

금융조합은 형식상으로는 조합원의 출자에 의한 협동조합이지만 정부 대여금으로 운영하고 재무감독국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관치금융기관이었다. 광주를 시작으로 1907년에만 17개의 조합이 설립되었다. 토지담보 대부를 의심하여 조합을 관설 전당포나 재산을 탈취하는 관아 정도로 생각하여 이를 멀리하는 사람들도 있어, 경주처럼 겨우 17명의 조합원으로 시작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합원이 수백명이었다. 1910년 말 금융조합 120개에 조합원 수는 3만9000여명에 달했다.

"정부에서 융희 원년(1907) 말부터 13도 각 지방 금융조합에 각기 1만환씩 대하하여 설립케 함은 모두 아는 바이거니와 근일에 조사한 것을 들은즉 13도에 조합 수효는 일백이요 대부하여 준 돈 현존액(잔고)은 48만2687환이라더라."(대한매일신보 1910.5.3.)

조합의 대부이자가 개인 대금업자는 물론 다른 금융기관보다 낮아 농민들은 대부금을 농우 구입 등 농업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고리대에만 의존하던 농민들은 비록 소액금융이지만 근대적 금융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금융조합은 1930년대 농가부채정리와 자작농 설정사업을 통해 전시체제하에 조선 농촌을 포섭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45년 912개에 달했던 금융조합의 후신이 현재의 농업협동조합이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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