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왕자호동-안다성///永世中立 實現 못한 貧弱한 國力•經濟力

bsk5865 2014. 5. 27. 07:5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5.27 05:47

 

 왕자호동-안다성///永世中立 實現 못한 貧弱한 國力•經濟力(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093 


왕자호동-안다성


왕자호동-안다성

작사 손로원 작곡 조춘영


비에 젖는 삼척장검 바람에 울고
옷소매를 쥐어짜는 빗방울 소리
충성에 젖었느냐 사랑도 젖어
두 갈래 쌍 갈래 길 해가 저물어
아 ~ 왕자 호동아 왕자 호동아


자 문고에 북을 치면 호동이 죽고
자명고를 없애 놓면 모란이 죽고
사랑을 찾아갈까 충성을 바쳐
장부의 굳센 마음 눈물에 젖네
아 ~ 왕자 호동아 왕자 호동아


永世中立 實現 못한 貧弱한 國力•經濟力

조선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한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메디슨(Angus Maddison)의 세계 경제 역사통계(The World Economy:Historical Statistics, 2003)와 국내연구를 종합해볼 때, 1900년경 조선의 인구는 1600만명 남짓하고, 1인당 생산은 1990년 물가로 620달러 정도였다. 당시 중국은 1인당 생산에서 조선과 비슷했으나 인구가 25배나 많았다. 일본은 조선보다 1인당 소득에서 2배, 인구에서 2.7배가량 많았다. 러시아는 조선보다 1인당 소득에서 2배, 인구수에서 7.7배에 달했다.

당시 조선은 1인당 생산에서 아시아 평균 정도였고 인구밀도도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었으나, 국력에서 자신의 지배를 노리는 중국•일본•러시아에 도저히 대적할 수 없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중국보다 1인당 생산이 높았던 것은 조선과 중국이 여전히 농경사회에 머문 반면 일본과 러시아는 근대 공업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경 국내총생산 중 공업의 구성비를 보면, 조선과 중국은 4% 정도였던 반면, 일본과 러시아는 10%를 넘었다. 경제력은 재정 규모를 결정하고, 재정 규모는 군사력을 결정한다. 1900년 대한제국의 총세입결산액은 461만원(圓)으로 조선 내 총생산의 1%, 일본 총재정지출의 1%에 불과했다. 대한제국의 회계에 들어가지 않는 세입을 포함하더라도 일본의 2%에 불과했다.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어윤중(魚允中)은 1881년 귀국 보고에서 새로운 세계질서는 “춘추전국시대보다 치열하게 다투는 대전국(大戰國)시대와 같으며 그 속에서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정부는 군비 강화를 추구했지만, 그 근본 제약은 빈약한 재정이었다. 1903년 조선정부는 일본으로부터 군함〈사진〉(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 화물선과 석탄 운반선으로 쓰였던 낡은 배에 구식 함포를 달아 군함으로 개조한 것이다) 1척을 사들였으나, 일본과 중국처럼 함대를 유지할 능력은 없었다.

김윤식은 1880년대 정부 정책에 깊이 간여한 후 국력이 약하고 재정이 빈약한 조선에 “양병(養兵)이 급선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서” ‘민력(民力) 양성’의 내정에 충실하면서 세력균형의 평화외교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5년 열강의 대립을 촉발한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조선정부는 중립화 안을 검토하고 대한제국기에 외교정책의 중심으로 삼아 적극 추진했다. 이에 1900년 일본정부에 영세중립을 위한 협조를 구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스위스와 벨기에가 중립을 유지할 만한 국력을 갖춘 반면 조선은 그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였다며 거절하였다. 벨기에와 스위스는 조선보다 인구가 적었지만, 1900년 1인당 소득이 각각 3,731달러, 3,833달러로 조선은 물론 일본보다도 훨씬 많았다.

‘황성신문’ 1900년 11월 29일자에 의하면, 벨기에는 징병제로 군인수가 5만 명에 달해 강대국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은 개항기에 다방면의 근대적 변화를 경험했지만, 제국주의시대에 영세중립화를 실현할 정도의 국력과 군사력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