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수의 터미널-백승태 작사 한다혜 작곡 김수환
一 행복했던 사연들을 낙엽처럼 싣고 기약 없이 멀어져 간 서러운 여인아 잊으리라 다짐하며 눈을 감아도 돌아서니 그 자리엔 허망한 소상 주간지에 표시던가 애수의 터미널
二 영롱했던 나날들을 쇼핑백에 담고 꿈결인 듯 사라져간 서러운 여인아 다시 보니 미련스레 발 돋음 해도 차창마다 비치는 건 낮 선 얼굴들 담배연기 목 매이는 애수의 터미널
失敗로 끝난 마지막 양전(量田) 1898년 6월 조선왕조 마지막 양전인 광무양전이 시작되었으나 1904년 2월 중단되었다. 근 180년 만에 시행된 양전이고 주무관청으로 양지아문도 설치되었지만 정부 재정은 양전 경비를 염출하기도 어려운 정도였으며, 지세 증수를 위해 결수를 대폭 올리자 민의 저항이 있어 곧 중단되고 말았다. 1901년 초 지계(토지문서)를 발급하는 지계아문이 설치되었다. 토지매매는 원래 관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지만 차츰 그런 관행이 사라져 위조문서도 횡행하고 외국인의 불법 토지매입도 증가하였다. 지계 발급은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양안(토지대장)이 완비되어야 했기에 지계아문은 양지아문을 합병한 후 양전을 재개하였다.
"근년 이래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삼남 각도에 양지(量地)를 착수하다가 중지하고, 다시 지계아문을 개설하고 지계(地契)를 실시한다더니 근일에 그 아문을 또 폐지하고 탁지부로 부속하였는데, 그동안 양지한 총 212군 중…168군의 양안(量案)을 정리하여 얻은 결총이 10만 2044결 19부1속이오."(황성신문 1904.4.4.)
광무양안〈아랫 사진〉이 토지를 결부제로 표시한 것은 이전의 양안과 마찬가지였다. 1결[=100부]은 지세부과 기준 단위로서, 토지등급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광무양안에는 새로 양전척실적(量田尺實績)이 기재되고 매매문서에 면적 단위로 사용된 두락을 기재한 경우도 있지만 두락의 실면적은 천차만별이었다. 양전에서는 토지의 절대면적보다 지세부과를 위한 결부 파악이 중요했던 것이다. 또 황제의 무한권력을 표방한 대한제국은 소유자를 한시적 소유자[時主]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광무양전이 근대적 토지조사가 될 수 없는 근본적 이유였다.
러일전쟁의 발발로 광무양전은 중단되고 지계아문도 폐지되었으며,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차츰 정부 기관에 일본인이 등용되었다. 토지측량업무는 1905년 탁지부 사세국 양지과에 속하였으며 이때 처음 일본인이 초빙되어 한국인에게 측량술을 강습하였다. 견습생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6개월 속성으로 훈련시킨 후 기수 혹은 고원으로 채용하였다. 교육기간이 극히 짧아 초보적인 측량술을 강습함에 불과했지만, 대구 평양 전주에도 양성출장소가 개설되었다.
측량기수 양성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에 자극받은 민간에서도 측량학교가 속속 개설되어 바야흐로 측량기술자 양성의 시대가 되었지만 토지조사의 실시에 대해 일본측은 매우 신중한 태도였다. 오히려 광무양전의 좌절을 만회하고 싶은 한국측 대신이 토지조사의 필요성을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토 통감 역시 신중한 입장이었지만 동척(東拓•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을 전제로 하여 약속한 출자지 문제가 구체화되고 일본흥업은행으로부터 사업자금 차입이 결정되자, 1908년 말 태도를 바꿔 토지조사를 시행키로 하였다. 전국적 측량에 필요한 측량기수 양성을 위해 1910년 '학부와 교섭하여 외국어학교와 관립한성고등학교 내에 측량기술자양성소를 설립하고 4월 초에 학생을 모집'(황성신문 1910.3.17.)하자 지원하는 한국인이 매일 백여 명에 달했다〈윗 사진•임시토지조사국원 양성소 졸업생들,1911년〉. 측량기수의 양성은 수탈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새로운 토지조사(1912~18년)의 준비작업이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