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사랑-손인호 작사 월견초 작곡 한복남
一 술 취한 마도로스 이별의 사랑 부산항 뒷 골목에 막걸리 사랑 영도라 갈매기에 하룻밤 사랑 사랑도 천층 만층 구만층이 있다네
二 불 꺼진 선창마다 눈물의 사랑 서귀포 비 바람에 휘파람 사랑 울릉도 아가씨의 동백꽃 사랑 사랑도 천층 만층 구만층이 있다네
三 어스름 밤 거리에 담뱃불 사랑 뜨내기 낙화유수 황금의 사랑 열두 폭 포장 아래 백년의 사랑 사랑도 천층 만층 구만층이 있다네
外交界의 幕後 實力者, 獨 女人 손탁 "덕국(德國:독일) 여인 손택(孫澤)양은 내월 5일에 귀국할 터인 고로 지난 28일에 폐현하고 하직하였는데, 대황제 폐하께옵서 은으로 만든 술잔 제구를 하사하셨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8.31.)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왼쪽 사진 가운데>(주한 외교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발판으로 대한제국 외교계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했다. 손탁은 1885년 먼 인척인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다. 베베르의 처남이 손탁의 제부였다. 손탁은 프랑스령이었던 알자스로렌에서 태어났지만,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이 독일에 병합됨에 따라 국적이 독일로 바뀌었다. 독일 국적의 프랑스 여인이 주한 러시아공사의 인척 자격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손탁은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내부에 들어가 외국인 접대 업무를 맡았다. 손탁은 미모와 교양을 갖추었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가 능통했으며, 프랑스 요리 실력이 탁월했다. 궁내부에 채용된 손탁은 한국 정부가 주관하는 서양식 연회를 도맡았고, 고종이 경복궁에 건청궁을 건립할 때는 거실과 주방을 서양식으로 꾸미는 역할을 했다. 사교성이 뛰어난 데다 궁내부에 근무하면서 한국어 실력도 늘어 고종과 명성황후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당시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서양 요리였던 손탁의 프랑스 요리는 한국에 체류하던 서양인뿐만 아니라 고종과 명성황후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손탁은 한국 정부와 러시아공사관 사이의 중개자로서 제2차 한러밀약(1886)과 아관파천(1896)에도 개입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독살 공포에 시달리던 고종은 한식 수라상을 멀리하고, 손탁이 만든 서양 요리를 주로 먹었다. 러일전쟁 전까지 손탁은 사실상 고종의 전속 요리사였다.
고종은 1895년 손탁에게 정동에 있는 저택(대지 1184평)을 하사했다. 손탁의 저택은 서양 외교관들과 친미•친러파 정치가들의 회합 장소로 애용되었고, 서양인을 위한 식당 겸 호텔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서울에 호텔이라곤 일본인 전용의 파성관(巴城館)뿐이었다. 1902년 손탁은 궁내부로부터 건축자금을 지원받아 고종에게 하사받은 저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2층 양옥을 신축해 손탁호텔〈오른쪽 사진〉을 개업했다. 욕실 딸린 객실 25실을 갖춘 서울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은 궁중에서 사용되는 최고급 비품들로 꾸며졌고, 한국 정부의 영빈관으로도 이용되었다. 을사늑약을 체결하러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도 이 호텔에 투숙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러시아공사관이 폐쇄되면서 손탁은 더 이상 한국에 머물기 어려워졌다. 1909년 9월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에르(J. Boher)에게 양도한 후 25년간의 한국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궁내부는 손탁에게 그 동안 한국 정부를 위해 봉사한 대가로 3년치 급료 3만환을 은사금으로 지급했다. 손탁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에 매각되었고, 이화학당은 1922년 손탁호텔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프레이 홀(Frey Hall)을 신축했다. 프레이 홀이 1975년 화재로 소실된 뒤에는 그곳에 이화 100주년 기념관(2004년)이 들어섰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