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손인호 작사 천봉 작곡 한복남
一 잡는 손을 뿌리치며 돌아서는 그 사람아 너를 두고 짝사랑에 내 가슴은 멍 들었네 네가 잘 나 일색이냐 내가 못 나 바보 드냐 아~ 속 시원히 말을 해다오
二 말 못하는 이 내 마음 몰라주는 그 사람아 네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몰래 정 들었네 네가 잘 나 뽐내 드냐 내가 못나 싫은 거냐 아~ 속 시원히 말을 해다오
自由를 爲해 싸운 멕시코 同胞들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는 1909년 5월 19일 '멕시코에 있는 동포의 자유를 얻음을 치하함'이라는 논설을 통해, 멕시코 유카탄주 일대의 농장에 팔려왔던 한인 노동자들이 4년의 노예적 생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축하하고 있다. 그리고 1909년 5월 26일자 '국민회보'란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지회가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에 설립된 소식을 한 면 전체에 걸쳐 보도한다. '암흑 동천에 속박을 당하던 천여 명 동포가 우리의 조국을 건질 목적으로 국민회를 조직하였으니 5월 9일은 대한국민회의 한 큰 단체가 더 생겨 메리다 지방회를 조직하는 날이라'라고 이날의 행사를 소개하면서 이 단체에 가담하게 된 305명의 명단을 전원 수록하고 있다.
멕시코의 한인 이민은 1905년 일본 대륙식민합자회사(大陸植民合資會社)가 모집한 1033명을 멕시코 유카탄주 일대의 농장에 넘기면서 시작되었다. 4년간의 계약기간으로 멕시코 유카탄주 일대의 어저귀(선인장과의 용설란의 일종) 농장으로 팔려간 동포들은 갖은 고초와 학대 속에서 노예처럼 생활했다. 대한매일신보(1907년 7월 24일) 잡보란은 '한국사람 천여 명이 묵서가(멕시코)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 이광준이라는 사람이 거기서 탈출하여 나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는 그 천신만고의 정황을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논설 '묵서가에 있는 한인'(신보, 1907년 9월 17일)도 한국인 노동자가 멕시코를 탈출하여 독일 사람의 도움으로 일본 상선을 얻어타고 귀국하게 된 사연을 소개하면서 '일본인 회사의 거짓된 이민 모집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
멕시코 한인 노동자들〈큰 사진〉의 참상은 미주 한인 사회에도 상세하게 알려졌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공립신보(1908년 9월 23일)는 멕시코에 살고 있는 채등진씨가 "천여 명 남녀 동포가 일본인의 간계에 빠져 만리 타역에 팔려온 노예가 되어 우마(牛馬)의 채찍을 당하며 인간 지옥에서 고초를 겪었다"라고 편지로 알려왔다면서 이들과 내왕할 수 있는 방편을 찾겠다고 보도하였다. 멕시코 한인들의 고통이 미국 한인사회에 알려지자, 대한국민회 본부에서는 황사용•방화중 두 위원을 멕시코로 파견하여 그 실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작은 사진〉(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숙소•출처='미주한인 100년의 발자취' 사이트) 이들은 멕시코 도착 후 메리다 지역의 여러 농장을 찾아다니며 한인들의 노역을 확인하고 노동조건의 불합리를 따지기도 하였다. 이들이 보내온 조사 내용은 신한민보(1909년 5월 12일)의 1면에 보도되었다.
이들은 멕시코 한인 노동자들의 4년 노동계약이 만료되는 1909년 5월 12일을 기하여 대한국민회 메리다 지회의 조직을 주도하였으며, 한인들의 현지 생활방법을 지도하고 그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 멕시코 한인들은 유카탄주 일대에 정착 자립하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고 현지에 한글학교를 세워 모국어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멕시코 혁명 과정에서 상당수는 쿠바로 건너갔지만, 초기 한인들의 고난과 분투는 멕시코 이민사에 뚜렷이 남아 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