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그림자-남인수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一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주막 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드린다 물위에 복사꽃 그림자 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二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첫 사랑 버린 고향이길래 종달새 외로 히 떠있는 영도다리 난간잡고 울적에 술 취한 외항선원 담배불 연기가 내 가슴에 날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 꿈이 어린다
日本人이 支配한 農工銀行 1905년 7월부터 백동화의 교환이 시작되자 조선인 상인들의 금융이 일제히 경색되었다. 경성의 조선인 상인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경성상업회의소를 창립하고 탁지부 대신에게 300만원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그러나 재정고문 메가타의 반대로 구제금융이 불가능해지자, 상인들은 그에 분개하여 7월 31일 항의의 표시로 철시(撤市)하였다. 다음날 아침 상업회의소를 방문하여 상인의 요구를 듣고 고종에게 상주한 시종관 최익진은 저녁에 다시 상인들을 만나 "소청한 300만원을 정부에 하달하여 조치하겠으니 우선 백동화 10만원과 지폐 10만원으로 갈증을 해소하라"는 칙어를 전하자 회중이 황감함을 이기지 못해 만세를 삼창하였다.(황성신문 1905.8.2.)
그러나 메가타는 고종이 하사한 구제 자금마저도 강권적으로 정지하였다. 그러면서 표출된 민심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 서울에 한성공동창고회사,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에 어음조합(수형조합)을 설립하였으나, 그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여전히 계속되는 금융난 해소를 위해 1906년 6월 1일부터 한성•평양•대구•전주 농공은행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황성신문 논설(6월22일)은 '은행의 확장과 발달이 나라 부강의 기초'라면서 은행설립을 축하했다. 농공은행은 11개까지 늘었다가 1907년 한호농공은행〈왼쪽 사진>(현재 롯데백화점 자리)을 비롯한 총 6개로 통합되었다.
농공은행 설립위원에는 관민이 대략 반씩 포함되었으며 민간위원은 해당 지방의 조선인 명망가들이었다. 일본흥업은행의 출자로 은행을 설립하려는 메가타의 구상이 수포로 돌아가자 설립위원은 한국인 주주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금융난 속에서 조선인 주주 모집은 쉽지 않았다. 한성농공은행 설립위원 한상룡은 "재정고문부의 사무관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경성을 돌아다니며 힘써 권유하였지만 좀처럼 응모자가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하였다('한상룡군을 말한다'). 결국 정부가 주식 일부를 인수하고 또 불입자본금을 상회하는 영업자금까지 대하하였다.
한성농공은행 은행장에 백완혁〈오른쪽 사진〉, 이사와 감사에도 모두 조선인이 선임(1906년) 되었다. 다른 농공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주주도 조선인, 중역도 전부 조선인이었기에 황성신문 논설도 농공은행을 조선인 은행으로 생각하고 그 설립을 축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은행의 실질적 경영은 일본인 탁지부차관이 임명하는 일본인 지배인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러니 조선인에 대한 금융은 사실상 제한적이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황실의 지위는 높았으되 국권은 달아나고, 전에 없던 은행은 설립하였으되 돈푼은 구경할 수 없으니… 은행 설립의 잔치를 누가 즐겨하나 한인은 기갈이 자심하여 약을 먹고 죽는 자가 많은데…"(1909.4.4.)라고 냉소하였다.
합방 이후 각 농공은행은 통합되어 1918년 조선식산은행이 되었다. 자본금 천만원의 식산은행은 명실상부한 일본인 은행이었으며, 농공은행의 조선인 중역들도 모두 퇴진하여 조선인은 은행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식산은행은 전국에 산재한 금융조합을 지배하면서, 금융계에서 조선은행과 쌍벽을 이루었다. 식산은행이 1954년 산업은행으로 탈바꿈하면서 은행장을 한국은행처럼 총재라 한 것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