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비련-금사향 작사 강남풍 작곡 전오승
一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 그대 따라 가리라 기약했더니 이다지도 세상은 말이 많은가 아~ 공주 몸이 원망스럽소
二 씌워진 의무이라 난들 어이하리오 부질없이 님 가슴에 불을 놓고서 못 이루는 이 사랑 원망을 마오 아~ 이내 순정 무너만진다
捕虜와 다름없는 韓國의 女王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제3대 통감에 임명된 날은 1910년 5월 30일이었다. 3개월 후에 한일 합방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초대 총독이 되어 언론을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 식민통치를 강행하다가 1916년 10월에는 일본 총리가 된 제국주의 군인•정치가였다.
데라우치는 통감에 임명된 후에도 한동안 동경 육군성의 통감부 출장소에서 집무하다가 7월 23일 일본 제1함대 군함을 타고 인천을 거쳐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에 왔다. 그의 서울 부임은 정부 차원의 행사처럼 삼엄하게 치러졌다. 각부 대신과 차관 등 칙임관(勅任官)의 고위직은 인천까지 마중을 나갔고, 각 관청 주임관(奏任官)들은 서울역에 도열하여 영접했다. 기차가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19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연도는 일체의 통행이 차단됐다.
데라우치의 아내는 남편이 한국에 오기 하루 전인 7월 22일 저녁 두 딸과 함께 장녀의 사위인 서기관 고다마(兒玉)를 대동하고 서울에 도착했다. 연락선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열차편으로 상경했다. 8월 1일 순종의 황후를 폐현하는 자리에서 훈1등 서봉장을 받았다(대한매일신보, 1910.8.6.). 고종의 부인 엄 황귀비(엄비)도 8월 16일 데라우치의 부인과 두 딸을 궁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황성신문, 8.17.).
이 해 11월 12일자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엄 황귀비와 '전 통감의 부인'이라는 일본 여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실었다〈사진〉(왼쪽이 엄귀비). '포로와 다름없는 한국의 여왕 : 전 일본 통감(Ex-Resident-General) 부인과 그의 두 아이들'이란 제목 아래, '엄 황귀비는 원래 시녀였으나 그의 미모에 끌린 고종이 두 번째 부인으로 삼았다'는 설명을 달았다. 황귀비는 명성황후가 살아 있을 때에는 궁에서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후 다시 궁으로 들어와서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은을 '유학' 명목으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데리고 떠났고, 엄비는 1911년 7월 죽을 때에도 아들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 사진이 실린 시점은 한일합방 직후였고, 데라우치는 이때 통감이 아니라 총독(Governor-General)이었다. 사진의 일본 여자가 '전 통감의 부인'이라면 소네 아라스케(曽根荒助:1849.2.20.~1910.9.13.)의 아내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합방 전에 찍은 사진을 입수하여 잡지에 실었을 것이다. 두 어린이는 나이로 보아 소네나 데라우치의 손녀였을 것이다. '아이들(children)'이라는 설명도 딸이 아니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어린이의 한복 차림이다.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줄이려는 고등 전술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이들에게 입혔을 수도 있다.
소네는 프랑스에 유학했던 정치가로 사법대신•농상무대신•재무대신을 역임했다. 통감 재임 중에 병으로 사임하여 사진이 실리던 때에는 사망한 뒤였다. 엄 황귀비는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들여 양정의숙을 지원하는가 하면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창설하였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