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소야곡-남인수 작사 이부풍 작곡 박시춘
一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몸부림 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저 달이 밝혀주는 이 창가에서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노래 부른다
二 바람결에 너의 소식 전해오면 행복을 비는 마음 애달프고 나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사랑 차라리 잊으리라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 섧구나
韓國人의 眞情한 벗, 베어드 29세의 젊은 미국인 선교사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1931)가 막 결혼한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891년 2월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31년 11월 평양에 묻히기까지 그는 숭실대학 설립을 통한 교육운동과 한국어 보급, 농촌계몽운동 등에 일생을 바쳤다.
베어드〈사진 가운데. 왼쪽은 대학동료 마펫〉가 태어난 1862년 미국은 남북전쟁(1861~65)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또 그의 학창 시절은 흑인 노예해방전쟁의 후폭풍기에 해당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하노바 대학(5년 과정)과 시카고 맥코믹 신학대(3년 과정)를 다닌 그는 복음주의적 기독교 경건 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조선에 먼저 도착한 대학 동료(마펫)의 영향으로 조선에서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1890년 11월 애니 로리 애덤스(Annie Laurie Adams, 1864~1916)와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날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극동의 작은 나라로 향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베어드 내외는 부산을 시작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5년 동안 1000마일에 걸친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이 여행을 통해 조선의 발전에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고종의 교육입국 조칙이 반포(1895년)되자, 1897년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웠다. 평양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그는 "이 지역은 전통적 양반 세력에 비해 자립적 중산층이 비교적 강해 전통 사회에 대한 변혁의 열망도 강하다"고 지적했다. 교명을 '숭실'로 정한 것은 "조선의 실학사상과 미국의 실용주의를 접목시켜, 이 땅에 실질을 숭상하고 합리적이며 보편성 있는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려는 의도"라고 밝혔다. 학교 설립자금은 본국 선교부에서 지원을 받았으나, 1906년 '대학'으로 인가받을 때는 평양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도왔다.
평양 '숭실학당'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으로 물리•화학•생물•지질•광물•천문•음악•경제•법률 등 실용적 학문을 교과목으로 채택했다. 배출된 졸업생으로는 조만식•정일선•박형룡•김동진•박태준•현재명•한경직•김형남 등 해방 이후 여러 분야에서 한국 사회의 실질적 토대를 닦은 이들이 많다. 베어드는 105인 사건과 3•1운동 등으로 이들이 일제에 쫓길 때 피신시켜 주는 등 적극 보호했으며, 1938년에는 폐교를 감수하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다.
그가 숭실대 초대 학장 직을 수행하는 동안, 서북지방 개신교 애국계몽 운동에 헌신하던 부인 애니 로리 여사가 타계했다. 가누기 힘든 슬픔을 안고 귀국한 베어드 박사는 1918년 다시 방문한 모교(맥코믹 신학대)에서 로즈 메이(Rose May Fetterolf, 1881~1946) 여사를 만나 재혼한 후,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교재편찬, 한국말 신문발행, 성서 및 문학작품 번역, 지방순회 계몽활동 등 이 땅의 여명기를 여는 데 전념했다. 베어드 박사와 두 부인은 모두 평양에 묻혀 있다. 학교측은 6•25때 미군의 도움으로 그의 비석을 옮겨와 절두산 선교사 묘역에 다시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1954년 서울에 재건된 숭실대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