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배신자-배호///民族紙 申報를 떠난 梁起鐸

bsk5865 2014. 8. 24. 13:00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8.24 10:44

 

 배신자-배호///民族紙 申報를 떠난 梁起鐸(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537 


배신자-배호


배신자-배호

작사 이인섭 작곡 김광빈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순정을 뺏어버리고 얄밉게 떠난 님아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을까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행복을 짓밟아 놓고 얄밉게 떠난 님아
더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돌아서 가는가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民族紙 申報를 떠난 梁起鐸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한 후 가장 큰 관심사는 신문 제작을 총괄하던 양기탁(梁起鐸)(대한매일신보 편집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양기탁, 맥켄지 촬영)의 거취문제였다. 신문 매수 과정에 깊이 간여했던 주한 영국 총영사 헨리 보나르는 매도계약이 체결된 직후 본국 외무성과 일본 주재 영국대사 맥도널드(C.MacDonald)에게 보낸 보고에서 양기탁을 자기 나라에 충성하는 애국심이 매우 강한 인물로 평가했다.

"양기탁은 몇 년 동안 제한 없는 펜의 자유를 향유해왔으나, 이제는 폭력을 선동할 것이 아니라, 그의 동포들이 조선인의 안녕을 희망하고 있는 (일본) 정부를 따르는 좋은 시민이 되도록 촉구하는 것이 그가 선택해야 할 과정임을 깨달을지도 모릅니다."(1910.5.21.)

보나르는 통감부가 극비리에 양기탁에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신문을 운영하도록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물론 통감부의 감독하에 말입니다. 양기탁은 소유권 변경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하고 있으나, 신문 경영을 위해 2개월 동안 당분간은 남아 있기로 동의했습니다." 양기탁이 그의 영향력을 한국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여 진정한 애국자로 처신할 것을 확신한다고 보나르는 말했다. 영국 외교관 시각에서 양기탁이 일본에 협조하는 것이 한국인의 이익에 부합되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나르의 예측은 빗나갔다.

양기탁은 통감부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신보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는 신보와 황성신문에 광고를 실어 사퇴사실을 널리 알렸다. 사퇴광고는 6월 14일부터 여러 차례 실렸다. 연락할 일이 있는 사람은 서대문 밖 사저(팔각정동 195통 4호)로 통신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양기탁과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임치정(林蚩正)도 신보사의 회계직을 사임하고 퇴사하였다는 광고를 실었다(신보와 황성신문, 6.25.~7.1.).

통감부는 신보사의 매수 사실을 비밀에 부치면서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W. Marnham)으로 되어 있던 발행인을 6월 14일자로 이장훈(李章薰)으로 바꾸고, 사옥도 중부 포전 병문 이궁 앞 종로의 탑골공원 인근 양옥으로 옮겼다. 이전까지는 지금의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 쪽 시청광장으로 바뀐 자리에 있었다.

신보가 통감부에 팔렸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통분하는 독자들도 많았다. 신보는 6월 14일자 사설을 통해 거짓 해명을 시도했다. 사장 만함이 신문 발행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사원들이 "상당한 값을 주고 신문사를 넘겨받은 것"이라며 "외국인의 이름을 빌려서 우리 동포의 정신을 깨우치게 하는 것보다 한국인이 직접 경영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보가 통감부의 손에 넘어간 것을 끝내 숨길 수는 없었다.

이에 통감부는 양기탁 등이 협조하지 않는 데 대한 보복으로 1911년 1월 신보사 관련자들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또 1911년 9월에는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신민회사건(105인 사건)을 조작해 양기탁 등 민족주의자들을 검거 투옥하는 대규모 탄압에 나서게 된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