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만리-현인 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
一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눈에 익은 네 모양 꿈속에 보면 꽃이 피고 새도 우는 바닷가 저편에 고향산천 가는 길이 고향산천 가는 길이 절로 보이네.
二 날이 새면 만나겠지 돌아가는 배 지나간 날 피에 맺힌 꿈의 조각을 바다 위에 뿌리면서 나는 가리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으로.
三 보르네오 깊은 밤에 우는 저 새는 이역 땅에 홀로 남은 외로운 몸을 알아주어 우는 거냐 몰라서 우느냐 기다리는 가슴속엔 기다리는 가슴속엔 고동이 운다
최봉준, 한러 무역을 개척하다 "본인이 1400톤급 화륜선 후시미마루(伏見丸)를 인수해 원산항과 성진항으로 일주일에 한 차례씩 왕래하옵는데 매월 소를 1000여 마리씩 매입할 터이오니 각처 우상(牛商)들께서는 원산, 성진 양처로 소를 가져와 팔아주시고, 세 항구를 왕래하는 승객께서도 많이 이용해주시기를 희망. 성진 준창호 최봉준 고백"(황성신문, 1907.4.27.)〈왼쪽 사진〉
최봉준(崔鳳俊)은 1907년 일본 선적 대형 화륜선 후시미마루를 인수해 원산, 성진〈오른쪽 사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정기선을 운항했다. 대한제국 정부도 차관을 얻어야 겨우 도입할 수 있었던 기선(汽船)을 개인 자금으로 인수한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선적(船籍)을 한국으로 이전하고 이름도 '준창호(俊昌號)'로 개칭했다.
최봉준은 1862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8세 되던 해 그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자, 모친과 함께 추풍(Suyfun), 연추(Kraskino) 일대를 떠돌며 황무지를 개척해 기반을 다졌다. 21세 때 면장에 해당하는 '탈시'라는 러시아 관직을 얻었다. 최봉준의 러시아 이름은 '최 니콜라이'였지만, 한국인들은 그를 '최 반수(班首: 우두머리)'나 '최 노야(老爺)'라 불렀다.
최봉준은 1895년 러시아 공직을 사임하고 러시아 군대에 쇠고기를 납품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성장했다. 수요 예측을 잘못해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군대에 군수물자를 공급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넘어 연해주 전체를 대표하는 사업가로 명성을 떨쳤다. 최봉준은 사업으로 축적한 부를 러시아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희사했다. 경영난에 빠진 연해주 명동학교에 거금을 기부해 교육 사업을 벌였고,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해 연해주에서 간행된 최초의 한국어 신문 '해조신문'을 창간했다. 해조신문은 매호 일본의 한국 침탈 야욕을 성토하는 사설을 실었고, 거사 전 안중근이 쓴 '인심결합론'을 게재하기도 했다. 안 의사 거사 후에는 그의 변호비와 유족의 생계비도 지원했다.
최봉준은 1906년 24년 만에 귀국해 모지(기타큐슈), 상하이, 옌타이, 하얼빈, 원산, 성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대규모 무역업체 준창호를 설립했다. 그러나 한•중•일•러 4개국을 아우르는 무역망을 구축하려는 그의 원대한 구상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러시아 군대에 납품이 중지되었고, 일본은 반일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의 사업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최봉준씨는 수만원의 왜채를 청산치 못함으로 그 소유 상점 준창호를 일인이 집행하였다더라."(권업신문 1912.12.15.)
귀국한 지 7년 만에 도산한 최봉준은 추풍으로 돌아가 친구들이 마련해준 두어 칸짜리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한때 '해운왕' '무역왕'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그는 낮이면 몇 이랑 밭을 갈고 밤이면 성경을 읽으며 소탈하게 지내다가 1917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연해주 한인 사회는 물론 함경도 도민, 멀리 미국 한인 사회까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