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항구야-진방남 작사 천아토. 작곡 이재호
一 들어라 마지막 잔이다 날이 새면 이 항구도 이별이란다 갈매기 비에 젖어 날기 싫어 울고 있다 하룻밤 풋사랑이 왜 이다지도 나를 울리나 잘 있거라 ~ 미련 두고 나는 간다.
二 들어라 마지막 잔이다 네가 있는 이 항구도 이별이란다 이별로 나눈 술잔 눈물 젖어 넘쳐온다 하룻밤 풋사랑이 왜 이다지도 나를 울리나 잘 있거라 ~ 눈물 두고 나는 간다.
三 들어라 마지막 잔이다 야속하던 이 항구도 이별이란다 낯 서른 해안선이 달빛 젖어 멀고 멀다 하룻밤 풋사랑이 왜 이다지도 나를 울리나 잘 있거라 ~ 설움 두고 나는 간다
皇帝의 눈•귀 가린 內侍 姜錫鎬 "태황제 때에 내시 강석호, 이유태 등이 황제의 눈과 귀를 막아 가리면서 조정의 정치에 관계하며 참견했다. 안팎의 높고 낮은 관직이 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는데,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니 재산이 황실보다도 많았다. 그 일당이 차차 늘어갔으니, 세력을 믿고 제멋대로 막되게 굴어서 사람들이 모두 흘겨보았다. 일본인들이 환관의 폐단을 자세히 알아내고는 그를 미워했다. 이에 그 무리들을 모두 줄여 없앴으니, 모두 수천 명 가운데 겨우 6명만 남았다."(대한계년사)
민비가 시해되고 몇 달 되지 않아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고종을 배종(陪從)하면서 이 일을 성사시킨 자가 내시 강석호(姜錫鎬)〈오른쪽 사진〉(경기도 용인에 있는 그의 묘비)였다. 그 공으로 강석호는 시종원봉시에 임명되더니 고종이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설립한 후에는 고종의 최측근에 자리 잡았다. 계비인 엄비를 비호하면서 권력을 강화하여 마침내 내시부 최고 지위인 상선의 자리에 올랐다. 친일인사들은 엄비가 이용익, 이근택, 이지용, 내시 강석호 등과 부화뇌동하여 자기 몸에서 난 영친왕을 옹립하기 위해 러시아•프랑스로 하여금 일본을 해하려 한다고 일본공사에게 보고했다.
내시들 중 총애를 받아 수십 년 동안 세도를 부린 사람은 김규복•황윤명•이용선•라세환•강석호•김한종 등이었으며, "이들은 서로 결탁하여 국가의 큰 좀벌레가 되었는데 그중 강석호가 으뜸"(매천야록)이었다. 내시들의 권세가 얼마나 막강했던지, 대한매일신보 논설(1908년 5월 3일)은 '정계의 비루한 태도'라는 제하에,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이라는 대신들이 강석호가 오면 이같이 애걸하고 라세환이 오면 또한 이같이 애걸하더니, 이제는 일본인의 노예 노릇을 한다"고 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감지한 일제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면서 황제에 대한 고립정책으로 내시〈왼쪽 사진〉(엘리자베스 케이스가 그린 조선시대 내시) 감원을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내시 김한종은 군부대신 이근택에게 따지기를, "당신들은 내시들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지만 결국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은 당신들이 아니냐. 우리는 일본인과 반면식도 없는데, 어두운 밤까지 애걸하며 다니는 자들이 도리어 내시들을 핑계 삼느냐"(매천야록)라 하였다.
일제는 관제개혁을 통해 일본인을 궁중에 배치하고 내시와 궁녀의 수를 크게 줄였다. 권력을 행사하던 내시들은 하루아침에 막다른 길에 몰렸다. 권좌를 상실하고 두문분출하던 강석호는 이후 금전과 토지 소송에 걸려 수감되었다. 양자 이규염은 그의 석방을 청탁하고자 수원•용인 등지에 있는 논 160여석락(36만여평)을 헐가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바쳤다. 대한매일신보(1909년 11월 13일)는 "고자 대신 강석호씨 감옥에 갇혀 죽을 지경 된다더니 총리대신 문 밑에 동록 귀신 들어가매 칠년 징역 죄인이 백옥같이 되었다데"라고 냉소하였다.
겨우 풀려난 강석호는 그 많은 뇌물을 쓰고도 여전히 백만장자로 불릴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20년 후 양손자 이근홍의 양자인 이실경이 강석호를 대상으로 양증손자로 입적해달라는 소송을 내 화제가 되었는데, 이는 강석호가 풍전등화 같은 한말에 뇌물로 모은 거대한 재산을 탐내서였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