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처녀-최숙자 작사 천지엽. 작곡 송운선
一 영산강 굽이굽이 푸른 물결 다시 오건만 똑딱선 서울 간 님 똑딱선 서울 간 님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못 믿을 세월 속에 안타까운 청춘만 가네 길이 멀어 못 오시나 오기 싫어 아니 오시나 아 ~ 푸른 물결 너는 알지 말을 해다오
二 유달산 산마루에 보름달을 등불 삼아 오작교 다리 놓고 오작교 다리 놓고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밤이슬 맞아가며 우리 낭군 얼굴 그리네 서울 색시 고운 얼굴 정이 깊어 아니 오시나 아 ~ 구곡간장 쌓인 눈물 한이 서린다
湖南 第一 義兵將 沈南一 "해와 달 밝고 밝던 이 나라 강산/ 어쩌다 먼지 속에 들어갔느냐/ 맑은 날 못보고 지하로 가니/ 붉은 피 한에 맺혀 푸른 피 되리."
호남 제일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사각 사진〉은 1910년 7월 23일 대구 감옥에서 순국(殉國)하면서 조국 강산과 이별하는 시를 지었다. 그가 품은 한(恨)은 네 가지였다.
"첫째는 외국의 침략자와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해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요, 둘째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하고 죽어 불효의 귀신이 되는 것이요, 셋째는 사로잡혀 죽음의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구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이요, 넷째는 지하로 가서 선왕과 순절한 충신들께 할 말이 없는 것이오."
1871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농촌 유생 출신인 심남일은 병법서와 수호지 등을 즐겨 읽으며 의협심을 키웠다(대한매일신보, 1909. 10. 16.). 을사늑약 직후 일제에 대항해 거병하려 했으나 병사들이 모이지 않자 김율 의병부대에 들어가 경험을 키웠다. 1908년 3~4월에 기삼연•김태연•김율 의병장이 차례로 체포되거나 총살되자, 김율 의병부대 부장이었던 심남일은 함평•남평•보성•장흥 등지에 흩어졌던 의병들을 모았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20~30대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좌•우익과 선봉 3개 부대 150~200명으로 구성됐다. 규율이 엄격해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무기는 뇌관식으로 개량한 화승총이 주력이었고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도 있었다.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했고 안규홍•전해산 부대 등과 연합해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자료집인 '심남일 실기(實記)'에는 1908년 3월 7일부터 1909년 5월 12일까지 '접전(接戰)일기'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심남일 부대는 전남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보성 천동 전투에 이르기까지 모두 13차례의 접전에서 적 40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심 의병장은 뛰어난 지략으로 기민한 유격 전술을 구사했다. 일제는 '현재 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라고 부를 정도였고, 당시 신문들은 전해산 부대와 함께 호남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의병장으로 보도하였다(대한매일신보, 1909. 2. 13.).
심남일은 본명이 심수택(沈守澤)이었는데, 의병장이 되면서 남일(南一)로 바꾸었다. 호남 제일의 의병장이 되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다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심남일은 1909년 9월쯤 황제의 조칙을 받고는 의병을 해산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국권회복운동 방법을 모색하다가 1909년 10월 9일 일제에 체포되었다〈큰 사진〉(일본의 호남대토벌 때 체포된 의병장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심남일).
심남일 의병장은 재판 과정에서 "국가가 난을 당하면 신하와 백성이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만고에 바꾸지 못할 떳떳한 이치"라며 죽음 앞에서 의연했다. 그는 "나는 죽으면 마땅히 사나운 귀신이 되어 맹세코 네 나라(일본)를 없애고야 말겠다"고 했다. 그는 이천만 동포가 자신의 마음과 같기 때문에 자신이 죽더라도 또 다른 남일(南一)이 있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순국하였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