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 길-진송남 작사 정두수 작곡 한산도
一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 장 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저토록 비를 맞고 혼자 거닐까 밤비가 소리없이 내리는 밤에
二 밤도 깊은 덕수궁 돌담 장 길을 비를 맞고 말없이 거니는 사람 옛날에는 두 사람 거닐던 길을 지금은 어이해서 혼자 거닐까 밤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
동양의 엘도라도 운산(雲山)금광 "아국(我國) 산금액(産金額)은 재작년에 500여만 환이요, 작년에 600여만 환인데, 산액의 최다한 자는 운산(雲山)금광이니 매년 약 300만 환을 산출하고, 그 다음은 순안(順安)금광이니 매년 약 30만 환을 산출한다더라."('황성신문', 1910. 2. 20.)
평안북도 운산군에 있는 운산금광〈왼쪽 사진〉은 2위보다 산금액이 10배나 많은 동양 최대의 금광이었다. 1910년 약 111만달러의 금을 생산한 이 노다지 금광의 소유주는 한국 정부나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였다. 1895년 미국인 모스(J.R.Morse)〈사각 사진〉가 운산금광 채굴권을 손에 넣은 것은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H.N. Allen)의 주선 덕분이었다.
1884년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왕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한 인연으로 어의로 임명되고, 고종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설립했다.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을 거치면서 알렌은 고종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1895년 알렌은 '10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산금광 개발권을 확보하지만, 현직 외교관 신분으로 직접 이권 사업에 나설 수 없어 무역상 모스를 내세운 것이었다.
모스는 25년간 운산군 일대 28억 평의 광구에 대한 독점적 채굴권을 부여받았고,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 등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 대가로 고종에게 회사 지분 25%를 넘겼다. 그러나 금광 개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한 모스는 1897년 헌트(L.S. Hunt)에게 단돈 3만달러를 받고 개발권을 양도했다. 헌트는 자본금 500만달러를 들여 '동양광업'을 설립하고 개발에 나섰다.
1899년 헌트는 고종과 계약을 개정하여, 고종이 소유한 주식 25%를 10만달러에 인수하고, 생산량에 상관없이 매년 1만2000달러를 상납하며 계약 기간을 25년으로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두 차례 더 계약 기간을 연장해줘 1954년까지 늘어났다. '동양광업'은 1903년부터 이익 배당을 시작했다. 12.5%의 배당률로 지급된 첫해 배당금만 53만3000달러. 만약 고종이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으면, 첫해에 13만3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고종은 1년 배당금보다 적은 돈으로 지분을 모조리 넘긴 셈이었다.
한일 강제합병의 정치 격변 속에서도 동양광업은 건재했다. 일본 관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운산금광 채굴권을 빼앗을 구실을 찾았지만, 아무런 계약상의 결함도 찾아내지 못했다. 동양광업은 매년 100만달러 이상의 금을 생산했고, 단 1달러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1903년부터 1938년까지 36년간 매년 10% 이상의 고율의 배당을 실시했고, 배당금 총액은 투자금의 3배에 육박하는 1437만여달러에 달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미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39년 동양광업은 일본광업에 800만달러를 받고 운산금광의 권리 일체를 양도하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