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 주나 휘파람 소리
二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三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마는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 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廣開土大王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다른 이름; 담덕(談德)/영락대왕(永樂大王)/안(安)
생애와 업적
고구려의 국내성이 있던 중국 지린 성 지안시에는 높이가 6.39 미터나 되는 아주 오래된 비가 하나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오랜 세월 이끼를 뒤집어쓴 채 역사의 그늘에 숨어 있던 이 비가 광개토대왕릉 비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880년 무렵이다. 비의 몸체 내면에는 고구려의 건국 내력과 광개토대왕의 대외정복 업적 등을 자세히 기록한 1,700여 자의 글자들。1 새겨져 있다. 당시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일부 글자들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부분도 있고,또 계획적으로 조작된 듯 석회가 발라져 있는 부분들까지 있어 이 비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 가운데 하나다. 일본은 이 비문을 의도적으로 오역하여 식민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한‘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로 조장하기도 했다.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성강자로 성장하던 고구려는 342년(고국원왕 12) 커다란 치욕을 겪는다. 전연을 세운 모용황이 침입해 선왕이었던 미천 왕의 묘를 파내고 왕의 어머니를 비롯해 남녀 5만 명을 포로로 잡아간 것이다. 고국원왕은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고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전연에 조공을 바치고 스스로를 신하라 일컬어야 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고구려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태학(太學)을 설치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 조직을 정비하는 등 고구려의 기반을 잡기 위한 정책들을 강력히 추진했다. 또한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고국양왕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는등 외치에 힘썼다.
이렇게 잘 다져진 토양 위에서 광개토대왕은 열일곱 살 되던 391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열 살이 채 못되어서부터 큰아버지인 소수림왕 옆에서 정치를 익혔고,태자로 있던 5년 동안 정치 수업을 받았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은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다. 즉위하던 해 7월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키고,9월 거란을 정벌하여 잡혀갔던 1만 명의 백성을 데려왔으며,10월 백제 관미성을 함락시키는 등 거칠 것 없이 정복 전쟁을 벌여나갔다. 이후 거란과 숙신을 정벌했고,동부여를 무력화시켰으며,후연의 공격을 물리쳐 랴 오둥과 만주 땅의 주인이 되었다. 또한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한강 이북의 땅을 거의 차지했다. 한편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 왜구를 격퇴시키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따르면 22년 동안 재위하면서 64곳의 성과 1,400곳의 촌락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한다.
‘넓은 땅을 개척한 왕’이라는 이름처럼 광개토대왕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였다. 서쪽으로는 랴오둥 반도를 완전히 차지했고,북쪽으로는 카이위안-창춘-닝안을 잇는 선까지,동쪽으로는 두만강 하류의 북간도 훈춘까지,그리고 남쪽으로는 임진강유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이렇듯 화려한 정복 활동에 비해 국가를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392년(광개토대왕2)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407년(광개토대왕 17) 봄 2월에 궁궐을 증축 수리 했다. 409년(광개토대왕 19)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여러 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들을 옮겼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짤막한 기록이 갖는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세운 것은,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소수림왕의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나라와 백성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 절들을 평양에 창건했다는 사실은 광개토대왕이 이미 평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궁궐의 중축과 수리는 커져가는 국가의 규모와 정치의 효율성을 위한 조치이다. 아버지 고국양왕이 392년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동쪽에 독산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이듬해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했다는 기록은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남진정책이 광개토대왕 때 이미 의도된 것이 아니었나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이후 약 200년간 고구려의 태평성세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3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를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는 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해,그 아들인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북서쪽으로는 만주 지방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 최초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자주성을 높이기도 했다.
평가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광개토대왕의 위대함은 영토를 넓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직 간접 지배 아래 두었을 뿐 아니라 후연을 멸망 시켜 그 지역을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두는 등 동북아의 고구려 대문명권을 건설했다. 그 결과 관개토대왕의 영향 아래 있게 된 한반도의 문화적 일체감이 강화되어 차후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국강상 지역 무덤에 계시는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셨던 사랑스런 큰 임금님 뜻을 담아'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이렇게 평했다.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대왕의 위력은 사해 에 떨치셨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나라가 부강하나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임나 일본부설
일본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 일제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낸 식민사관으로,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 대표적인 타율성 이론의 하나이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391년) 기사를“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동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여 임나 일본부설의 결정적 근거로 제시했지만,앞뒤 문맥으로 보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