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집힌 풋사랑-남인수 작사 조명암 작곡 박시춘
一 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 애당초 잘못 맺은 애당초 잘못 맺은 아 ~ 꼬집힌 풋사랑
二 마음껏 울려 다오 네 마음껏 때려라 가슴이 찢어진들 가슴이 찢어진들 아 ~ 못 이겨 갈쏘냐
三 뿌리친 옷자락에 눈물이 젖는다 속아서 맺은 사랑 속아서 맺은 사랑 아 ~ 골수에 사모 쳐
金首露王
생애와 업적 1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낙동강 서쪽에 분포했던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치열한 영역다툼을 벌이며 발전했던 고대 국가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흡수 되여 버린데다가 전해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그 역사는 베일에 가려있다.
개국부터 멸망까지 체계적으로 전해지는 정사(正史)가 없기 때문 에 더욱 그렇다. 가야에 대한 문헌 자료들은 《삼국유사》《삼국사기》 <광개토대왕 릉 비문〉 등의 국내 기록과 《일본서기》《삼국지》 등 외국 기록,그리고 조선시대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 등에 단편적으로 전할 뿐이다. 가야의 건국 시조인 김수로왕에 대한 이야 기는《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한다.
천지가 개벽한 뒤 9간이 추장이 되어 백성 1만 호, 7만 5,000 명을 거느려고 산과 뜰에 모여 살았다. 이들은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북쪽의 구지봉에서 이상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음성 같은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소리에 이삼백 명의 사람들 이 모여들었다.
“여기에 사람아 있는가?"라는 소리에“우리들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라 다시 물어"구지봉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라고 하셔서 왔도다. 너희들은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려라. ‘거북아,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아니하면 구워서 먹으리’그러면서 땅을 다지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라 했다.
9간들이 그 말대로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뒤 하늘에서 붉은 줄이 늘어져 땅에 닿았다. 줄의 아래를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빛 상자가 싸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해처럼 둥끈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12일이 지난 이른 아침에 무리들이 모여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동지들로 바뀌어 있었는데 용모가 거룩했다. 무리들이 평상에 앉히고는 절을 했다.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자 커가 아홉 자로 은나라의 탕왕과 같았고,얼굴은 용과 같아서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고. 눈썹에서 여덟 가지 광채가 나서 요 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두 개씩인 것은 순 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했는데,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 했다. 나라를 대 가락이라 일컬었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일컬었는데 곧 여섯 가야 종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건국의 정통성을 하늘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고조선,부여,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기록은 가야가 9간이라는 토착 세력과 수로왕이라는 이주민 세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김수로 세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김수로 왕을 비롯한 6가야의 건설자들이 흉노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금관가야에는 김수로 왕 말고도 또 다른 이주민 세력이 있었다. 수로왕의 부인인 허 황옥 집단이 그들이다. 9간 등이 가야의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배필로 삼으라고 권하자 수로왕은“자신이 내려온 것이 하늘의 명인 것처럼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라며 거절한다. 그런 뒤“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쫓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며 《삼국사기》는 허 황옥의 도착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허 황옥은 신보•조광 등의 신하 외에도 여러 시종과 노비를 데려왔다고 하는데,이는 또 하나의 세력이 가야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수로왕을 만난 허 황옥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신성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려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나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그 배필을 삼게 하라’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으니,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유타국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인도 캔지스 강 중류의 아요디아국이라는 설과 태국에 있는 옛 도시 아유타야라는 설,또 허황후의 시호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점에 착안해 중국 쓰환성 근처에 있는 보주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이 역시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어쨌든 허 황옥 세력은 이후 금관가야의 왕비족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누리며 김수로 세력과 연합해 금관가야를 다스렸다.
김수로 왕은 199년까지 157년 동안 왕으로 있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면서 가야에 대한 수 많은 자료들이 모두 사라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의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가야는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지형 때문에 열두 개국 정도의 나라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해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 못했다. 가야의 역사는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해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뉜다. 전기가야에는 김해의 금관 가야가,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 세력이었다. 비록 독립된 왕국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가야 는 한의 선진문물이 이동하는 관문에 위치해 있었기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이를 바탕으로 높은 문화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된 왕국을 이루기 전 시작된 신라와 백제의 침입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 하다 562년 대가야를 끝으로 가야의 역사는 한국 고대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최근에는 점차 가야를 독립된 고대 국가로 인정하 여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학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평가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뒤에도 수로왕은 가야의 시조로서 계속 제사 지내졌다. 문무 왕은 수로왕릉의 제례를 후손들이 계속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이것은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