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 옛터-남인수 작사 왕 평 작곡 전수린
一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二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三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닫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崔致遠 자:고운(孤雲)/해운(每雲)
생애와 업적 868년 어느 날,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어린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이들이라고 하지 말아라.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가서 열심히 하거라"
이역만리 먼 곳으로 어린 이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아들이 어려서부터“차분하고 똑똑하며 학문을 좋아하는” 촉망받는 소년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아찬 이상의 벼슬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837년 한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기록을 남길 만큼 학문에 매진한 결과 유학 생활 6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설치한 과거로 발해인과 신라인이 많이 응시했다. 과거에 합격한 뒤 876년 율수현의 현위 (縣尉)로 임명되었다.
최치원이 율수현 현위로 있을 때의 전셜은 많이 알려져 있다. 율수현 초현관 앞산에 옛 무덤이 있었는데 쌍녀분이라 불렸다. 어느 날 최치원은 이 무덤의 주인인 두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강제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씨 자매 이야기에 감동한 최치원은 이들을 위로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뉘 집 딸이 묻혀 있는 무덤인가/ 적적한 황천 문에서 가는 봄을 얼마나 원망했을까"로 시작되는 시에 감동한 두 소녀의 넋이 그 날밤 최치원 을 찾아와 시로 화답하며 하룻밤을 보내고 갔다고 한다.
최치원의 글재주를 감탄하는 이 전설은 당나라뿐 아니라 송나라•원나라•청나라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천재적인 신라 유학생에 대한 당나라의 관심은 지대했다. 중국의 역사서인《신당서》에“최치원은 고려인으로 빈공과에 급제하고 《사륙집.《계원 필경》을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중국 정사에서 외국인의 작품을 소개한 것은 최치원이 유일하다.
이듬해 최치원은 고급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현위를 사직하고 입산하였으나,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변의 휘하에 들어간다. 최치원의 글재주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79년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를 맡으면서부터이다.“황소가 이 글을 읽다가 책상에서 나동그라졌다” 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토황소격문〉이 이때 씌어졌다. 고변의 종 사관으로 있으면서 지은 1만여 수에 달하는 글들은 귀국 후 정리하여 《계원필경》으로 묶었는데,그 양이 20권이 되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 최치원은 중국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황소의 난을 진압 하는 데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한 고변은 낙담하여 술에 빠져들 기 시작했고, 황소가 조카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반란은 끝이 났다.
술에 빠져든 고변에게서 더 이상의 미래를 찾기 어려워서인가,아니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해서인가,최치원은 17년 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한다.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지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로 임명했다.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表文)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신라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최치원을 맞이한 고국의 현실은 황소의 난을 겪던 당나라의 어려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더구나 “장차 지신의 뜻을 펴고자 하였으나 신라가 죄퇴해 가던 때라 시기하는 자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전할 만큼 그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 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외직을 자청해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天嶺郡,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등지의 태수를 역임했다.
신라를 개혁하려는 그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급히 해결하여야 할 사안을 논하여 국왕에게 건의한 글)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했으나 당시 중앙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 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이후 최치원은 은퇴를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은둔하여 열정적으로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막 글〈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의하면 908년까지 생존햐였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만이 전할 뿐이다.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 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자 최치원이“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왕건에 대한 지지를 완독하게 표현했다는 말들이 전 하지만,고려가 창건될 무렵은 최치원의 나이 환갑을 넘은 때로 그가 살아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평 가 난세를 산 최치원의 삶은 불행했다. 유학 •불교 •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자신의 뜻을 현실 정치에서 펼쳐 보이지 못하고 갚은 좌절을 가슴에 안은 채 사라져버린 최치원을 후대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고려시대 이규보는 우리나라 학자들은 모두 최치원을 조종(祖宗)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모든 유학자들이 최치원을 유학의 시조로 섬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에 보인 관심 때문에 조선의 이황은“전적으로 망령된 불교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며,또한 사대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일제시대 신채호에게는 “일개 선비”라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고려는 1020년(현종 11) 최치원을 내사령 (內史令)에 추증 했다가 다음 해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를 올렸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분묘에 배향했다.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사상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태인의 무성서원,경주의 서악서원,함양의 백연서원,영평의 고운영당,대구 해안현의 계림사 등에 모셔졌다.
우리 역사에서 영정이 가장 많은 사람이 최치원이다. 유교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학문적 성과를 거두고 유불선 합일을 주장한 그의 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격화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