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열차-남인수 작사 반야월 작곡 나화랑
一 밤차는 가자고 소리소리 기적소리 우는데 옷소매 잡고서 그 님은 몸부림을 치는구나 정두고 어이 가리 애처로운 이별길 낙동강 굽이굽이 물새만 운다 눈물어린 경부선.
二 떠나는 가슴에 눈물눈물 서린 눈물 고일 때 새파란 시그넬 불빛도 애처로운 이 한밤아 마즈막 인사마저 목이 메어 못할 때 쌍가닥 철길 우에 밤비만 젖네 울고가는 경부선.
三 아득한 추풍령 고개고개 눈물 고개 넘을 때 희미한 차창에 그 얼굴 떠오르네 비치네 기차도 애처롭게 허덕지급 달릴 때 새빨간 님의 순정 가슴에 젖네 비내리는 경부선
大祚榮 시호; 고왕(高王)
생애와 업적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무너진 이후 고구려 옛 영토의 대부분은 신라와 당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힘의 공백 상태에 담겨졌다. 신라는 평양 이남을 차지했을 뿐이고 당나라 또한 만주지역을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영주에 영주도독부를 설치하고 코고려와 말갈 유민들을 그 부근으로 이주시켰다. 그런데 영주도독 조문홰가 가혹한 통치를 하자 696년 거란인 이진충 • 손만영 등 반란을 일으켜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했다. 영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 유민 걸걸중상과 말갈인 걸사비우는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했다. 대조영은 걸걸중상의 아들로 아버지와함께 고구려 유민을 이끌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을 책봉하며 회유하려 했지만,이들은 거부했다. 회유책이 실패하자 측천무후는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 출신 장수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토벌하도록 했다.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이 먼저 이들을 맞았다. 걸사비우가 첫 전투에서 죽자, 말갈족은 대조영이 이끄는 군대에 합류했다. 이 무렵 대조영이 군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아 걸걸중상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해고의 추격을 받아 대조영은 압록강 상류를 넘었다. 이때 대조영을 따르는 무리들은 고구려 유민들과 고구려 부흥군,그리고 말갈군까지 아우르는 거대 세력이었다. 대조영은 당나라 군사들을 깊은 산골로 유인했다. 천문령(天門嶺 지금의 지린 성)을 넘어 군사들을 숲속에 매복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산 아래 밀림지대였다. 추격에 정신이 팔려 있던 당나라 군사들은 천문령을 념어오다 바로 기습을 당했다. 이해고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지만,수십만에 달했던 당나라 군시들은 전멸당했다. 이 전투를 천문령 전투라 하는데,이 전투의 승리로 대조영은 자신의 힘을 대내외에 확실히 알릴 수 있었다. 이 승리는 발해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언 계기가 된다.
대조영은 그 뒤 계속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698년 무렵 동모산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진국(震國)을 세웠다. 고구려가 망한 지 30년 만에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진국은 고구려 출신의 지배층과 말갈 출신 백성들의 결합으로 건국되었다고 전해진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던 대조영은 빠른 시간 안에 나라의 기틀을 잡고 동부 만주 일대에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나라를 세운 뒤 곧 돌궐과 국교를 맺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냈다.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우호를 지켜나갔다. 당나라는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 공식적으로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이지만, 이보다 먼저 진국에서 나라 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조영은 나라를 세운 뒤 21년 만인 719년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고왕이다. 719년 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했다.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가 3대 문광에 즉위했다. 이 무렵 어느 정도 국가기반이 확립되었다고 판단한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먼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 • 중대성 • 선조성) 6부(충 • 인 • 의 • 예 • 지 • 신부)제도를 실시하는 한편,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대외적으로는 동북 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빼 국력이 향상되자,762년 당은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작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했다.793년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 • 강왕 • 정왕 • 희왕 • 간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으나,별다른 치적은 없다. 간왕에 이어 대조영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 대인수가 선왕에 즉위했다. 션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 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랴오둥 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랴오허 유역까지 진출해 그곳에 목저주 • 현토주를 설치했다. 이후 랴오둥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다. 선왕 대에 발해는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으며,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의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되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했는데,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925년 12월 말 마침내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해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해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15대 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는 멸망했다.
평 가 발해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유학지 들은 우리 역사에 발해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삼국시대 이후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발해고》라는 책을 쓰면서 “그 대(大)씨는 누구였던가? 그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그들이 차지하였던 땅은 어디였던가? 그곳은 우리의 고구려였다”라며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유득공의 이러한 노력은 남쪽에는 신라,북쪽에는 발해라는 역사의식을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남한에서는 당시를 남북국 시대라 하고,북한에서는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발해 문왕이 스스로를 ‘고려왕’ 이라고 부른 국서가 전하고,일본 역사책에서도 발해 사신을 고려 사신으로 부르는 등 발해가 우리의 역사라는 증거가 존재하는데도,주변 국가들의 입장은 다르다.
중국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에 불과한 ‘발해군’ 이었다며 자기들의 역사에 편입시켰고, 러시아는 발해가 고구려를 일부 계승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말갈인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나라로 보고 있다. 한국사나 중국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말갈족의 독립 국가였다는 것이다. 현재 발해의 영역이었던 친양의 박물관에는 발해가 중국의 지방 정부였다는 소개와 함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를 계승했고 고구려인이 다스린 발해는 분명 우리의 역사다. 발해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말갈인 조차 실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라는 게 최근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