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낙화 유수-남인수///金庾信

bsk5865 2014. 10. 31. 08:4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0.31 06:26

 

낙화 유수-남인수///金庾信(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087 



낙화 유수-남인수

작사 조명암 작곡 박남포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멩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 많은 인생 살이 꿈같이 갔네


이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 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 강산에 봄 맞이가세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양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는데
시들은 내 청춘은 언제 또 피나


金庾信


생애와 업적

629년(진평왕 51)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하는 듯 보였다. 부상자가 늘어가는 가운데 신라군은 고구려의 기세에 밀리고 있었다. 이때 오늘날의 연대장이라 할 수 있는 부장군(副將軍) 자격으로 출전한 김유신은 그의 아버지 서현 장군에게 허락을 구한 뒤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고구려군에서도 장수 한 명이 뛰어나왔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김유신의 칼이 적장의 목을 베는 순간 신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기세로 몰아붙인 신라군은 고구려군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김유신은 595년(진평왕 17)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멸망한 가야의 왕손으로,증조할아버지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었다.

열다섯 살에 화랑이 되고,열일곱이 되던 해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의 땅에 침범 하는 것을 본 뒤 이를 평정할 뜻을 품고홀로 석굴에 들어가 수련했다.

그러나 가야의 후손이라는 신분적인 제약 속에서 김유신의 가문은 점차 쇠락해가고 있었다. 이 위기를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 보냄으로써 해결했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로,당시 왕이던 선덕여왕의 조카였다. 그런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리고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를 달아주게 했다. 또한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다는데도 김춘추가 결혼을 주저하자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왕의 허락 아래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의 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김유신은 642년 압량주 군주가 되었고,644년에는 서열 제3위 관등인 소판(蘇判)에 올랐다. 이 해 가을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7개 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하자 가족들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정하여 백제군 2,000명의 머리를 베었으며,개선하자마자 또다시 서부 전선으로 달려가 백제군을 물리쳤다. 《삼국사기》에 따르면,김유신은 수십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단 한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명장이요,전략가였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난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덕여왕이 죽고,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 마저 재위 8년 만에 죽자,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뒷받침한 김유신이 없었다면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를 자리였다. 김춘추는 자신의 셋째 딸을 세의 김유신에게 시집 보내 두 사람의 혈맹 관계를 더욱 다졌다.

660년 당나라와 신라의 백제 정벌이 시작되었다. 대장군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무너뜨리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황산벌 전투가 워낙 치열해 예정보다 하루 이틀 도착이 늦었다. 소정방은 이를 핑계로 신라의 장군 김문영을 목 베려 했다. 신라군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위염을 세우려는 술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도끼를 잡고 “먼저 당나라군사들과 싸운 뒤에 백제를 쳐부수겠다”며 성난 머리털을 꼿꼿이 세웠다. 소정방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 빢에 없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사비성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 하고 무너졌다.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 대각간(大角干)이 되었다.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에 ‘대’자를 더한 자리이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소”라며 선왕과 다름없는 믿음을 보였고,김유신 또한 죽을 때까지 문무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백제 부흥군을 평정한 신라는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74세의 나이로 병을 앓고 있었던 김유신을 배려한 왕은 김유신에게 전장에 참가하는 대신 국정을 살피게 했다. 그 해 9월 마침내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후 김유진은 태대각간(太大角千)의 자리에 올랐다.

673년 7월 1일 79세의 김유신은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봉하고 그 후손을 왕 손으로 예우했다. 왕족이 아닌 신하가 대왕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 은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평 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견해에 따라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삼국사기》에서 10권의 열전 가운데 3권을 차지할 만큼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의 업적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려시대에도 꼴 베는 아이와 소 먹이는 아이들까지 그를 알고 있을 정도로 사람 들이 그를 칭송한다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으며 , 김 유신이 당대에 정신(聖臣)’으로 추앙 받았다고 전한다.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통일국가에서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에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던 한말에 이르면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신채호는 김유신은 지용(智勇)이 있는 명장이 아니요,음험하기가 사나운 독수리 같았던 정치가이며,그 평생의 큰 공이 전장(戰場)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혹평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가 아니라 한반도 동남쪽을 차지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것을 애석해하는 마음도 실려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도 김유신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한편 민간에서 김유신은 무속적인 영웅으로 신격화되어,현재에도 많은 무속인들이 김유선의 초상을 신당에 모시고 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