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아 사랑-남인수 작사 박영호 작곡 박시춘
一 달뜨는 저녁에 지은 맹서가 꽃피는 아침에 무너졌구려 봄 없는 청춘은 이런 것이냐 울어도 웃어도 풀 길이 없네
二 세월은 덧없고 인생은 늙고 못 잊을 미련만 어이 길던고 뜬세상 인정은 이런 것이냐 속아도 내 운명 속여도 내 운명
三 상처 진 내 가슴 달랠 길 없고 가버린 옛사랑 찾을 길 없네 꿈같은 과거는 눈물이 드냐 버들잎 사랑은 물방아 사랑
張保皐 다른 이름; 장보고(張寶高),궁복(弓福), 궁파(弓巴)
생애와 업적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도 전한다. 먼저 중국의 기록으로는 중국 정사의 하나인《신당서》 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이 지은 《번천문집》의 〈장보고•정년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일본의 기록은 당시 중국에 머무르며 장보고와 신라인의 도움을 받았던 승려 엔닌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일본 정사인《일본후기》. 《속일본기》.《속일본후기》에 자세히 전한다.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사기》.《심국유사》는 비교적 간략한 편으로,중국의 기록을 재 인용한 것이다. 더구나《삼국사기》에는 궁복으로,《삼국유사》에는 궁파로 적혀 있어 사실상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낙인 찍혔기에 기록이 부정확한 것이다.
장보고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인 듯하다.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훗날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여 할 때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나,정년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청해진으로 온 부분 그리고 무엇보다 청해진이 그의 연고지였기 때문에 아마도 고향이 아닐까 하는 추측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보고가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하는 바 없다.‘헤엄을 잘 치며,말 타고 창을 쓸 때 누구도 맞서지 못한다”라는 것으로 평민 출신으로 바닷가에 살며 무예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 청년이 된 장보고는 자신보다 열 살 가량 어린 청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 지방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小將)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신라 사람으로 낯선 타국에서 군대의 중간 지휘자가 되었음은 그의 용맹과 무예가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군사적 경험은 이후 해적을 물리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당나라에 머물고 있는 신라인들의 신임을 쌓아 이후 재당 신라인 조직을 건설하는 기반을 닦았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생활하며 신라 사람들이 해적에게 붙잡혀 와 노예로 팔리는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당의 조정은 신라인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금지한 바 있으나,중국 연안지대 곳곳에서 자행되는 신라노예 매매는 뿌리 뽑히지 않고 있었다.
828년(흥덕왕 3) 장보고는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간청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 말에 감동한 흥덕왕은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고 군사 1만 명을 주었다. 신라의 정식 관직에는 대사라는 명칭이 없다. 엄격한 선분 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평민 출신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어렵자 장보고에게만 준 예외적인 관직이거나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별칭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추정된다. 또 한 김헌창의 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고 난 신라 조정에서 과연 해안지대의 군사기지에 1만 명이라는 군사를 보낼 수 있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는데,이는 현지 주민 1만 명을 장보고가 규합한다는 것에 대한 양해 정도로 추정하는 편이 타당할듯하다.
장보고는 완도에 성을 쌓고 항만시설을 갖추었다. 군선을 만들고 수군을 훈련시켰다. 장보고의 군선들은 황해로 출동해 해적을 소탕 했다. 후반기에는 상업 활동에 주력해서,일본과 당을 잇는 중개무역에 뛰어들었다. 신라는 당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보내 무역을 했는데 장보고가 이를 확대했다. 산퉁둥 성과 청해진,규슈에 신라의 배가 쉴새 없이 드나들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 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고,이러한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장보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흥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흥덕왕의 시촌동생인 상대등 김균정과 흥덕왕의 조카인 김제륭이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이 싸움에서 김균정이 죽고 김제륭이 희강왕이 되었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정은 가족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막강한 군사력과 자금력을 갖고 있었던 장보고는 이미 왕실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른지 3년이 채 안 되어 김명과 김이홍 등의 반란으로후 희강왕이 자결하고,김명이 민애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우정은 장보고에게“장군의 군사를 빌려 군부의 원수를 갚고 싶다”고 정했다. 장보고는 이를 받아들였다.
838년(민애왕 1) 청해진의 군사가 왕경(王京)에 이르렀다. 장보고는 근거지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고 5,000명의 군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정년이었다. 왕경에 이르기까지 몇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중앙군은 청해진 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청해진 군은 도망친 민애왕을 죽이고,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을 거두었다. 평민 출신인 장보고가 이끄는 군대가 신라의 왕을 바꾼 것이다.
장보고는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감의군사는 상징적인 군사 최고 지휘자인 듯하나 새로 만들어진 자리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식읍을 받았다고 했는데,이러한 특별대우는 김유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지 6개월쯤 지나 등창으로 죽자 문성왕이 왕위를 이었다. 문성왕은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고. 또한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섬사람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있겠느냐며 반발했다. 또 다른 얘기로는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부탁하며 왕위를 얻으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어쨌든 장보고는 크게 분노했다. 이후 그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군사행동을 벌인 구체적인 정황은 전하는바 없다. 신라 조정에서는 장보고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거짓으로 장보고에게 접근한 염장은 술에 최한 장보고를 칼로 찔러 죽였다.《삼국사기》는 장보고가 846년(문성왕8)에 죽었다고 전하지만,엔닌의 일기에 따르면 841년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징보고가 흥덕왕의 도움을 받아 완 도 정해진에 군사 시설과 무역항을 서{우고 대흔빼시대를 열었던 흔적 정해진 본부가 있던 섭을 에원싼 목 책이 Of직도 갯벌에 얻5혀 있다.
장보고의 허망한 죽음 뒤 그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염장이 진압했고,청해진은 염장의 통제에 놓였다. 장보고의 심복들은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나고 계속되는 완도 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신라의 국력을 키우고 국위를 떨치던 장보고의 죽음은 중앙의 귀족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의 대결에서 지방의 호족세력이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평 가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은 꼼꼼하게 작성한 자신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인연을 소개하며 장보고가 누군지,또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기록을 남겼다.그리고“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라는 편지를 남겨 장보고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당나라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두목은 그의《번천문집》 에 장보고 편을 따로 만들어 장보고의 일대기를 소상히 다루었다. 그는 장보고를 안녹산의 난때 활약한 곽분양에 비유하며,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우리 역사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장보고에 대한 일들을 상세히 전한 엔닌의 기록과 두목 덕분에 현재의 우리들은 당시 장보고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으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제3자의 입을 통해 공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장보고를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한 김부식 또한 그를 당나라 곽 분양에 비견되는 위대한 인물이라 하면서 의리와 용맹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충이 강조되었던 조선시대에는 반역자로 몰려 죽은 장보고가 제대로 평가 받기 어려웠다.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장보고의 위상(位相)은 다시 회복되었다.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 선각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근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해상왕국의 건설자’“해양상업 제국의 무역 왕" "해양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등이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검헌창의 반란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은 무열 왕의 후손으로서 선덕왕 사후 왕위 계승권 자였으나 원성왕(元聖王)에게 자리를 빼앗기자 아들 헌창이 반발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 등 옛 백제 지역의 지방 세력들이 대거 가담했으나 진압되었고,김헌창은 자결했다.3년 뒤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다시 봉기했다가 사형당하는 등 그 여파가 적지 않았다. 반란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방 세력들이 왕위 계승에 제 목소리를 낼 만큼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라 말기에 이르면 독자적 세력을 갖는 호족으로 변모한다.
견당매몰사 장보고가 당나라에 파견한 무역사절을 말한다.장보고는 당에 견당매물사를 보내 이들로 하여금 무역선인 교관선(交關船)을 인솔하게 했다.
회역사 징보고가 일본에 파견한 무역사절을 말한다. 장보고가 죽은 뒤 폐지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