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고란사 종소리 사모 치면은 구곡 간장 오로지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弓裔
활동분야; 왕
생애와 업적
궁예는 신라 제47대 왕인 헌안왕, 또는 제48대 왕인 경문왕의 아들이라 전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당시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이 아이가오(午)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에 태어났고,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아이를 죽이라 했다고《삼국사기》는 전한다.
불운한 출생을 전하는 이 기록은 혹 궁예가 당시 신라 왕실의 정치적 희생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한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뚜렷한 이유 없이 일관의 말 한마디에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잘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궁예는 그 위기를 무사히 빠져나와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그러나 다락 아래로 던져진 궁예를 받던 유모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바람에 평생 애꾸눈으로 살아야했다.
어린 시절 궁예는 장난이 심하고 유모의 말을 잘 안 들었던 모양이다. 10여 세가 됐을 무렵 유모는 “네가 나라의 버림을 받았기에 오늘날까지 몰래 길러왔는데, 너의 심한 장난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와 너는 모두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며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아버지와 신라에 대한 증오를 가슴에 품은 궁예는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를 떠나 세달사(世達寺)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선종(善宗) 이라는 법명으로 장성할 때까지 스님으로 살았다. 여전히 계율에 구속 받기 싫어하고 담력이 셌다. 재를 올리러 가던 길에 까마귀가 ‘왕(王)’자가 새겨진 막대를 바리때에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당시 신라 왕실은 이미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죽주의 기훤,북원의 양길 등 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군웅들의 이름이 산사에 있는 궁예의 귀에도 들려왔다.
궁예는 먼저 기훤을 찾았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던 듯하다. 궁예는 기훤 휘하에 있던 원회 • 신훤 등과 함께 양길 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궁예는 비로소 공을 세우며 자신의 무리를 이끌기 시작했다.894년(진성여왕 8) 명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3,500명을 모집하여 14개 대를 편성했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로 성장했다. 명주에서 궁예는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궁예가 신라와 양길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궁예에 대해서는 궁예와 견훤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린 《삼국사기》에서조차 “더불어 어려움과 편함을 함께하였고 관직을 주고 뺏음에 있어서도 공정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게 하였다. 이로써 뭇사람의 마음이 (궁예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추대하여 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후 궁예의 세력은 성장을 계속했다. 명주를 중심으로 강원도 북부 일대를 먼저 손에 넣고,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저족 • 생천. 부약 • 철원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896년 마침내 궁예는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송악의 실력자 왕건 집안이 그에게 귀부해왔다. 왕건의 아버지는 당시 스무 살이던 자신의 아들을 송악의 성주로 삼아달라는 제안과 함께 스스로 궁예의 신하가 되었다.
궁예가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우려 하자 양길이 주변 세력들과 힘을 합쳐 궁예를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양길까지 물리친 궁예는 901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다시 한번 자신이 고구려의 후계자이며 고려의 왕이리는 사실을 천명했다. 이후부터 궁예는 후백제의 견훤과 본격적인 영토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연호를 무태(武泰)라 바꾸었고,905년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궁예는 신라 편제(編制)를 버리고 독창적인 체제를 설치했다. 또한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는 등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泰封)으로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했다. 914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이렇듯 잦은 국호와 연호의 변경에 대해 후대인들은 그의 출생에서 비롯된 정신불안의 결과라고 보아 그를 광인 취급해왔으나 근래에는 이러한 국호 변경이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즉 첫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초기 점령 지역이 고구려의 옛 땅이었기에 그곳의 민심을 반영한 것인 반면 이후 신라 • 백제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이 세 지역을 모두 포괄하는 마진(대 동방국이라는 의미)으로 바꾼 것은 옮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고구려계의 반발을 가져왔고,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던 궁예의 정책은 호족들과의 불화를 낳았다. 궁예의 포악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부인 강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근래의 연구들은 호족들과의 불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915년에 궁예가 옳지 않은 일을 많이 행하자 부인 강씨가 안색을 엄정히케 하여 간하니 왕은 이를 싫어하여 강씨에게 말했다. 그러자 궁예가 ‘네가 다른 사람과 간음한 것은 무슨 이유 인가?" 강씨는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왕은 말했다. ‘내가 선통력으로 이를 보고 있다,뜨거운 불에 쇠 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찔러 죽이고 두 이들까지 죽였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이 이야기에 대해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궁예가 어린 시절 왕실에서 버림받은 충격에서 비롯된 정신분열의 결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궁예가 부인을 죽인 것은 개인적인 광기 때문이 아니라 대호족 세력이었던 부인 강씨 집안과의 어떤 알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한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추구하던 궁예에게 호족의 이익을 대표하는 부인은 제거할 수밖에 없는 정적이었다는 해석이다.
한편,《고려사》에서는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彌勒關心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淫行)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했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죄 방망이를 만들어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하여 죽였다”라고 하는 등 그 왜곡이 더욱 심해 왕건의 신하들이 집필한 궁예에 대한 기록을 과연 얼마만큼 신뢰해야 할 지 의문이 생긴다.
호족들의 반발에 궁예는 독단으로 맞서다 결국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궁예의 죽음에 대해《삼국사기》는 도주하다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하고,《고려사》는 도망치던 궁예가 남의 보리밭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 먹다가 농부에게 피살되었다고 각기 다르게 기록했다. 태봉의 도읍지였던 철원에는 궁예가 망할 때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통곡을 했다는 명성산(울음산) ,궁예가항전 했던 최후의 격전지인 보개산성,왕건과 싸우다 궁예가 달아 났다는 패주골, 궁예가 도망가다가 피신했던 곳이라는 개적동굴 등 수많은 흔적들이 아직까지 궁예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품은 채 흩어져 있다.
평 가
궁예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제왕운기.《고려사》에 전한다. 이 기록들은 모두 왕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을 만큼 광기 어리고 포악한 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나마 동정적이었던 시각들이 궁예를 신라 왕실에서 버림받은 데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망친 사람 정도로 평가했을 뿐 대부분 정격이 포악하여 스스로 묘혈을 판사람’ 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최근의 연구 성과들에 이르러서야 ‘왕건의 신하들이 기록한 자료’ 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권을 잡았다. 그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이 이용되었을 수 있다. 관련 자료가 고의적으로 인멸 되거나 변조된 상황에서 남아 있는 파편들로 맞추어가는 형편이기는 하지만 궁예 재조명 작업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