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심연옥 작사 최명호 작곡 최명호
一 한 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 어제 밤 이슬비에 목메여 우는구나 떠나간 그 옛님은 언제나 오나 기나긴 한강 줄기 끊임 없이 흐른다
二 흐르는 한강물 한없이 푸르건마는 목 메인 물소리는 오늘도 우는구나 가슴에 쌓인 한을 그 누구가 아나 구백 리 변두리를 쉬임 없이 흐른다
三 나루의 뱃사공 흥겨운 그 옛노래는 지금은 어데 갔소 물새만 우는구나 외로운 나그네는 어 데로 갔나 못 잊을 한강수야 옛꿈 싣고 흐른다
崔承老 시호: 문정(文貞)
생애와 업적 광종의 아들인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을 거두며 사촌동생인 개령군 치(治,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유학에 밝고 인품이 뛰어났던 성종은 981년 즉위하자 숭유억불정책을 표방했다. 그리고 이듬해 새로운 정치이념과 통치체제를、구현할 목적으로 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상소를 올리라고 명했다. 수많은 상소 중에서 채택된 것은 최승로의 ‘시무28조’ 였다.
최승로의 상소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대조에 대한 평가,뒷부분은 왕을 위한 28조에 달하는 시무 책이다.
최승로는 상소문을 쓰게 된 취지를 당나라 사관 오긍이《정관정요》를 편찬하여 현종에게 태종의 정치를 본받도록 한 것에 비유하며,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했다. 포용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신하를 잘 예우하고 참언을 멀리하는 왕이 그가 제시하는 군주의 모습인데,최승로는 태조가 바로 그러하다고 했다. 그리고 태조에게 네는 넓은 도량과 포용력을,혜종에게서는 왕족 간의 우애를,정종에게서는 사직을 보존하려는 의지를,광종에게서는 공평무사함을,경종에게서는 현명한 판단력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이와 함께 선대왕들이 저지른 정치적 실수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성종이 그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광종에 대해서는 즉위 후 7년 동안은 중국의 하 • 은 • 주 3대의 이상시대에 비길 만큼 높이 평가했으나 광종 대의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된 재위 7년부터는 “쌍기와 같이 쓸데없는 사람을 중용해 측근 세력을 제외하고는 군신 사이의 대화가 막히고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어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평가와 함께 28조에 이르는 장문의 건의사항이 이어지는데 이것이 지무 28조’ 이다. 28조의 내용 가운데 현재는 22조의 내용만 전한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서북변경의 수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간언하는 등 국방의 중요성을 말하고, 불교와 승려에 대한 지나친 예우를 삼가며 연등회(燃燈會) . 팔관회(八關會) 등의 행사를 철폐할 것,유교사상을 통해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광종 대에 지나치게 강화된 왕실 시위대와 궁중노비를 줄이고 신하를 예우할 것 중국과의 사무역을 금지하고 중국 문물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말 것,양인과 천민에 관한 법 등을 확립하여 엄격한 사회신분 제도를 유지할 것 등이다. 그의 건의사항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 문화 • 사회 • 행정 •국방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광종의 개혁정치에 커다란 반감을 나타낸 최승로는 광종 대에 이루어진 개혁을 대부분 부정하며 유교정치체제의 수립을 요청했다.
시무 28조를 올리던 당시 최승로의 나이는 55세,종2품의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이라는 벼슬을 맡고 있었다.
12세 때 태조가 그를 불러 《논어》를 읽혀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어린 시절에 비한다면 경종 대까지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문서 작성을 주로 하는 문한(文翰)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 태조는 상을 내라고 그를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생으로 보내 영재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나 한참 활동할 청년기였던 광종 대에 귀화인들을 중심으후 정치가 이루어졌기에 신라 6두품 가문 출신이었던 최승로에게 중앙 정치에 관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광종 후반기 과거에 합격한 선진관료 들이 등장하면서,신진관료 세력이었던 최승로의 입지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 최승로는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학문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을 것이다.
성종의 즉위와 함께 그의 위상은 급부상했다. 성종은 그가 올린 시무 28조를 채택히여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중앙관제를 3성 6부제로 전환하는 등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고려 사회를 양반 귀족 중심의 안정된 국가로 이끌었다. 또한 그의 건의대로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교를 중시했다.
최승로의 개혁론은 교육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종과 최승로는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고,각 지방에 학교를 설치했으며,전국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파견해 광종 대 과거제의 시작으로 불기 시작한 유학의 불씨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개혁 과정 속에서 최승로는 988년 종1품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에 올랐으며, 청하후(淸河候)에 봉작되어 식읍 700호를 받기도 했다. 이때 최승로는 회갑을 넘긴 몸이라 여러 차례 스스로 물드 날 것을 청했으나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듬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평 가 성종은 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교서를 내려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太師)로 추증했다. 또한 베 1,000필,밀가루 300석,쌀500석,유향 100량 등을 내려 장례비로 쓰도록 했다. 성종에게 최승로의 정치적 비중이 얼마나 컸나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유교사상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꿈꾸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스승이었고 동지였다. 성종 대에 고려가 안정된 국가의 기틀을 갖추게 된 데에 최승로의 공이 지대 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반면 중국식 유교정치체제를 지향한 성종 대의 개학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책임도 피해갈 수는 없다. 성종은 개국 이후 사용해오던 '조서’라는 용어를 황제가 사용하는 용어라 해서 제후의 용어인 '교서’ 라고 개칭해,스스로 제후국으로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3성 6부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도가 중국식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혁이 긍정적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또한 성종대에 강화된 유교정치는 이후 고려의 숭무(월武) 정신을 약화시켜 국력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성종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니라 최승로를 비롯해 당시 중국식 유교 정치체재를 추구했던 유학자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짐이다.
그러나 성종 대에 쌓은 최승로의 명성은 이후 왕들에게까지 이어져 제7대 목종은 최승로를 성종의 묘에 합사(合祀)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으며,제9대 덕종은 대광내사령(大匡內史令)이란 벼슬 을 추증 했다.
국자감 고려 성종 때 설치한 최고 교육기관. 유학학부와 기술학부로 나뉘었는데,유학학부는 다시 국자학 • 대학 • 사문학으로, 기술학부는 율학 • 서학 • 산학으로 나뉘었다. 국자학에는 문무관 3품 이상,대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했고,기술학부는 모두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들이 입학했다. 과거에 합격하면 교육은 끝나고,과거에 합격하지 못한다 해도 9년이 지나면 퇴교시켰다.1275년 국학으로 개칭되었고,1298년 충선왕이 관제를 개혁하면서 성균관이라 고쳐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연등회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 행사의 하나로,등불을 밝히고 다과를 베풀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가무를 즐기며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벌었다. 신라 때인 551년(진흥왕 12) 팔관회와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열리기 시작했고, 고려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거국적인 행사로 시행됐다. 고려 초기에는 정월 보름에 연등이 있었으나,987년(성좋6)에 중단되었다가 현종 때 2월 15일로 다시 생겨나서 고려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승되어,조선 초기에는 상원연등과 초파일연등이 계속되었으나,1415년(태종 15) 초파일연등은 중지되었고,1416년 이후로는 상원연등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초파일에 신도들의 대대적인 연등행사가 벌어질 만큼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팔관회 신라와 고려시대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던 의식. 특히 고려시대 개경과 서경에서 토속신에게 제사 지내던 의식으로,토착신앙에 불교의식이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신라시대에는 진흥왕이 551년 혜량(慧亮)을 승통(僧通)으로 삼고 팔관회법을 설치한 데서 시작되어 4회에 걸쳐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훈요 10조에서도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고,몽골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했을 때에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중시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팔관회는 토속신에 대한 제전으로서 등불을 환히 밝히고 술 • 다과와 함께 임금과 신하가 가무를 즐기면서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 행사였다고 한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