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라 기타 줄-손인호 작사 무적인 작곡 이재호
一 낯 설은 타향 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웬일인지 나를 나를 못 잊게 하네 기타 줄에 실은 사랑 뜨내기 사랑 울어라 추억의 나의 기타여
二 밤마다 꿈길마다 그림자 애처로이 떠오르네 아롱아롱 그 모습 그리워 기타 줄에 실은 신세 유랑의 천리 울면서 퉁기는 나의 기타여
三 꿈길도 그 추억도 애달픈 그 사랑도 모두가 조각조각 날러 간 꽃잎 기타 줄에 하소 싣고 떠도는 내 심사를 너만은 알아다오 나의 기타여
光宗 다른 이름: 왕소(王昭)
생애와 업적 고려 태조 왕건은 29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얻었다. 그 부인들은 대부분 각 지역을 대표하는 호족의 딸이었다. 25명의 왕자들은 자신들의 외가를 배경으로 후계자가 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왕건은 자신을 도와 전장을 누비며 많은 공을 세운 장남 왕무를 후계자로 세웠다. 그러나 왕무의 외가인 나주 오씨 집안은‘한미한’가문으로 별다른 세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왕건은 자신의 측근인 박술희를 왕무의 후견인으로 삼아 힘을 실어주었다. 외가를 배경으로 세력이 가장 컸던 왕자는 충주 유씨 소생인 왕요(정종)와 왕소(광종) 형제였다.
943년 왕건이 사망하자 왕무가 왕위를 이어 제2대 혜종이 되었다. 당시 최고 권력자는 왕규였다. 왕규는 왕건에게 딸을 둘이나 시집 보내 그 중 하나가 왕자 광주원군을 낳았고,혜종에게도 딸을 시집 보냈다. 왕건의 장인이자 혜종의 장인인 셈이다. 이 왕규와 왕요 왕소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데.《고려사》에 따르면 왕규가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사위인 혜종을 죽이려 했으며 혜종이 병석에 눕자 난을 일으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혜종과 그 후견인인 박술희와 왕규였다. 서경을 방어하고 있던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의 군대를 끌어들여 왕규를 제압한 왕요와 왕소 형제가 정권을 잡아 왕요가 3대 정종이 되었다. 앞뒤 상황으로 보아 왕요와 왕소 형제가 정변을 일으켜 혜종의 측근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차지했다고 보는 해석이 설득력을 지닌다.
정종은 정권을 장악하자 대대적인 숙청을 벌인 뒤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 대규모 공사를 강행했다. 하지만 그는 즉위한 지 3년 반 만만인 948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기록에 따르면 천둥과 벼락에 놀란 뒤 병을 얻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 역시석연치 않다.
정종이 죽자 그의 친동생 왕소가 제4대 광종으로 즉위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광종은 즉위한 뒤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즉위한 다음 해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대내외에 자신이 황제임을 선포했다. 또한 국초부터 당시까지 왕실을 위해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 포상했으며,주현의 세금 액수를 정해 호족들을 통제했다. 즉위 초반의 치세는 평화롭고 순조로웠다.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되어가던 956년(광종 8)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민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면서 광종의 본격적인 개혁정책은 시작된다. 원래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해 노비가 된 자들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주는 노비안검법은 호족들의 경제적 • 군사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또한 958년(광종 10)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제를 도입해 집권 세력의 물갈이를 시도한다. 후주(後周)에서 온 쌍기의 건의로 시작된 과거제도는 이후 우리 역사에서 문치주의(文治主義)가 도래하는 바탕이 되었다.
쌍기가 고려에 귀화해 광종의 최 측근으로 발탁된 뒤 중국 귀화인들이 대우받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중국인들이 고려로 귀화했다. 광종은 이들에게 신하들의 집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하사했을 뿐 아니라 신하들의 딸 중에서 규수를 골라 혼인 시켜주고,좋은 관직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광종은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할 새로운 세력으로 귀화인을 비롯해 후백제 및 고구려 • 발해 계열 등 그 동안 소외되었던 인사들을 적극 활용 해 기존의 호족 세력들을 대체했다. 광종이 귀화인들을 우대하자 광종의 최 측근이었던 서필이 간언(諫言)했다는 이야기가《고려사》에 전한다.
어느 날 서필이 광종에게 말했다.
신이 거처하는 집이 조금 넓으니 원컨대 헌납하고자 합니다" 광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했다.
‘지금 귀화인들이 관직을 선택하여 벼슬하고 집을 선택하여 거처하니 세신고가가 오히려 관직과 집을 끓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이 진실로 자손을 위해 헤아리건대 재상이 거처하는 집은 그의 소유가 아니니 청컨대 신이 살아 있을 때 취하십시오. 신은 녹봉 남은 것으로 다시 작은집을 지어 후회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광종은 화가 났지만 깨달은 바 있어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서필뿐 아니라 광종의 정책에 호족 세력들은 대부분 반발했다.황주 대 호족의 딸인 부인까지 반대했다. 광종은 비록 서필의 충언은 받아들였지만,대부분의 경우 호족들의 저항에 무자비한 숙청으로 맞섰다. 감옥이 부족해 임시감옥을 지어야 할 정도였으며 수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다. 숙청의 칼날은 부인과 태자에게까지 겨눠졌지만 다행히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옛 신하들과 이름난 장수와 대신들은 차례로 살육 당하고 친척들도 모두 멸망했습니다” 라는 최승로의 기록처럼 광종의 숙청은 무자비했다.
절대 권력을 꿈꾸던 광종은 관복 색깔을 네 가지로 구분해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관제 개편을 단행하는 등 독재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과거제를 통해 신진 세력을 대거 등장시킴으로써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개혁 과정에서 중국에서 귀화해온 세력에게 지나치게 많은 힘을 실어주어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들었으며,역모(逆謀)에 대한 경계가 심해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광종은 975년 5월 병들어 누운 며칠 뒤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평 가 고려 성종 대 유학자 최승로는 광종 초반의 정치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태평성대로 칭송하는 중국의 하 • 은 • 주시대와 견줄 만하다며 높이 평가했다. 반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는 즉위 7년 이후,특히 개국공신들을 대거 숙청하는 즉위 11년 이후의 정치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종은 고려의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안정시킨 왕이다. 그러나 이렇듯 고려를 안정시켰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많은 사람들을 냉혹하게 숙청했다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광종의 개혁이 긍정적이었다고 해서 무자비한 숙청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황제를 칭해 나라의 자존심을 세우고,인재를 고루 등용해 지역 차별을 철폐했으며,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해방시켰고, 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많은 피를 보아야 했을까? 근래의 역사가들은 즉위 11년 이후의 숙청은 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절대황권 구축을 위해서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불가피한 숙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