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마음의 부산항-손인호///萬積

bsk5865 2014. 12. 20. 09:15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2.20 06:39

 

마음의 부산항-손인호///萬積(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418 


마음의 부산항-손인호


마음의 부산항-손인호

작사 도미도 자곡 한복남


대불 깜빡이는 부산항 파도 멀리
쌍고동 울어울어 헤어진 사람아
오륙도 넘어갈 때 나리던 궂은비
아~ 떠나온 부산항구 마음의 부산항구


말 없이 정든 타관 부산항 별빛 아래
손수건 흔들면서 울던 사람아
송도섬 안개 속에 한숨만 길었소
아~ 떠나온 부신항구 마음의 부산항구


萬積


생애와 업적

무신정권이 들어선 1170년부터 몽골의 침입이 있기까지 1232년에 이르는 60여 년은 민란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정중부 등이 난을 일으켜 무신들이 권력을 잡았으나 그들은 고려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회 이념을 제시하지 못한 채 권력다툼에 빠져들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틈타 탐관오리들이 설쳐댔다. 여기에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흉년까지 겹치자 농민과 천민들의 봉기가 이어졌다.

1176년 공주 명학소(嗚鶴所)에서 일어났던 망이 • 망소이의 난처럼 대부분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지만. 1198년(신종 1) 개성에서 일어났던 노비 만적의 난은 그 성격이 좀 다르다.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다. 사노비는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로 가장 천한 신분이다. 사유재산으로 인정되어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는 비인격적인 존재였다. 오랜 세월 동안 세습되는 신분으로 살아오면서 노비들은 자신들이 그저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들이 다른 꿈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무선정변으로 고려 초기의 신분 질서에 큰 동요가 일어 났다.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천민출신 인물들이 관직에 오르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무신정권의 기반은 사병들이었는데,이 사병들 가운데는 힘깨나 쓰는 사노비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노비 선분이지만 힘과 무예가 갖춰진다면 제법 어깨에 힘을 주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무엇 보다,어머니가 노비였던 이의민이 펴고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을 보면서 불끈불끈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적도 개성의 송악산(松岳山)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며 동료인 미조이•연복•소삼•효삼과 함께 이런 생각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던 어느 날,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한 지 2년쯤 지난 1198년 3월이었다. 만적은 주변 노비들을 모아놓고 열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인년 이후 고관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가 따로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어찌 채찍 아래에서 뼈 빠지게 일만하겠는가?"

경인년(1170)은 무선정권이 들어선 해를 말한다. 무신들이 집권한 것처럼 우리도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 신분인 사노비들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 우리도 될 수 있다 를 외친 것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 자리에 모인 많은 노비들이 모두환호하며 찬성했다. 만적 등은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정(丁)자를 써주며, 이 글자를 달고 약속한 날에 집결하자고 했다. 궁궐 근처에 있는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북치고 고함치면 궁중에서도 환관들이 호응할 것이며,관노들이 궁중에서 처단할 사람들을 처단할 것이니 자신들은 먼저 최충헌을 죽이고 각자 자기 주인들을 죽인 뒤 노비 문서를 불태워버리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흥국사에 모인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 했다. 그 정도 인원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만적 등은 다시 보제사(普i齊寺)에서 모이기로 결정하며 모인 사람들에게 “일의 비밀을 보장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으니 결코 누설하지 말라” 고 당부했다.

하지만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은 반란이 성공하지 못할 것 같자 겁이 났던지 집에 돌아와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낱낱이 상전에게 말했다. 한충유는 바로 최충헌에게 고발했다. 최충헌은 만적 등 100여 명의 노비를 잡아들여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뒤 한충유에게는 벼슬을 주었고,순정에게는 은 80냥에 양인 신분을 상으로 주었다.

만적의 난은 이렇듯 허망하게 끝났지만,이후 노비들은 농민 저항에 동조하는 세력으로,또는 독자적인 봉기 세력으로 떠올라 역사의 곳곳에 저항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1200년 진주에서 노비들이 봉기해 1년간 일대를 장악했으며,1203년 개경의 노비들이 나무를 한다는 핑계로 산에 모여 전투 연습을 한 사실이 발각되어 50여 명의 노비들이 강물에 던져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평 가
비록 실패했지만 만적의 난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크다. 만적은 우리나라 최초로 조직적인 노비해방운동 편 선구자였다. 더구나 자신이 노비 신분이었다. 노비들의 힘만으로 신분해방과 정권탈취를 주장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만적의 난이 유일하다.

신분에 대한 권위가 흔들리던 당시 사회를 정확히 읽고 높은 사회의식을 펴 보였으나, 시대는 그의 의식을 따라오지 못했다. 만적의 주장이 실현되기까지 역사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 땅에 노비해방이 실현된 것은 갑오개혁이 있던 1894년. 만적은 무려 700견이라는 세월을 앞선 선각자였다. 그의 주장은 이후 천민들이 자신들의 신분에 대해,선분사회에 대해 고뇌하게 하는 씨앗이 되었다.

만적을 포함해 당시 터져 나왔던 천민 • 노비들의 목소리는 고려 전기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철폐하는 원동력이 되었고,농민과 천민들의 지위를 향상시켰다는 점에서 고려 사회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