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이별의 부산항-손인호///金富軾

bsk5865 2014. 11. 29. 09:36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1.29 06:32

 

이별의 부산항-손인호///金富軾(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301 


이별의 부산항-손인호


이별의 부산항-손인호

작사 손희담 작곡 한복남


송도야 잘 있거라 해운대야 다시 보자
백사장 숨은 추억 세월도 무심한데
흰돛대 어디 두고 물소리만 처량한가
사공아 정든 님아 나그네 울고 간다


오륙도 건너편에 영도다리 서러워라
부산항 정든 포구 떠난들 잊을손가
섬색시 검은머리 휘파람도 다정한데
뱃고동 슬피 울어 이별가 불러주네


金富軾

시호: 문열(文烈)

생애와 업적

이자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인종이 “이자겸은 짐에게 외조부가 되니 그 예우를 백관과 같이 할 수 없다. 여러 대신들은 이에 대해 의논하여 아뢰라 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신하들이 말했다. “이자겸은 마땅히 글을 올릴 때 신이라 일걷지 말고, 군신의 연회 때에도 뜰에서 하례하지 말고 바로 장막으로 나아가 절하며, 성상의 답례를 받은 뒤에야 자리에 앉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홀로 반발하고 나선 사람이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중국 고사를 예로 들며 말했다. 부모와는 높고 친함이 서로 멀거늘 어찌 임금과 예를 같이 하겠습니까? 마땅히 글월을 올릴 때에는 신을 칭할 것이고,군신 간의 예절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을 따라야 할 것이며, 궁중 안에서는 일가의 예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면 공의 (公儀)와 사은(私恩) 두 가지가 서로 순조로울 것입니다"

유학자로서 자신의 원리원칙에 따라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김부식의 모습은 이후 이자겸의 생인을 인수절이라 부르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신하의 생일을 절이라 불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반대했다는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교 경전과 중국의 역사에 해박했던 김부식이 중국 역사의 여러 사례들과《의례》의 조항을 조목조목 들어 가며 이자겸의 특별대우에 여러 차례 반발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이자겸이 김부식을 내쫓지는 않았던듯하다.

이자겸 일파가 제거된 뒤 김부식을 비롯해 이유 • 임원후 등아 빠르게 부상했지만, 또 다른 문벌가문의 부상이 탐탁지 않았던 이종에게 묘청과 정지상이 이끄는 서경 세력은 새로운 대안이었다.

이 무렵 나라 밖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에게 군신 관계를 요구해왔다. 권력을 잡고 있던 이자겸 일파는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사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해 금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고 있었다.

서경 세력들은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하게 되고 이자겸의 난을 겪는 등 어려움에 처한 것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며,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遷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보수적인 개경의 문별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던 이들의 주장은 왕을 황제로 높이고 금을 정벌하자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세력들은 서경 천도는 서경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며 반대했다. 이들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따라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대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서경에 대화궁을 짓는 등 서경 천도 의지를 강하게 보이던 인종이 1134년 이후 서경 세력에 대한 신임을 거두자 이를 눈치 챈 묘청 등은 1135년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국호를 대위(大爲),연호를 천개(天開)라 했으나 왕을 옹립하지는 않았다. 왕을 교체하기 위한 역모가 아니라 개경 세력을 제거하고 서경 천도를 단행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시질 이 봉기는 계획적이l라기보다는 우발적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서경 세력의 핵심 인물인 정지상 • 백수한등이 봉기 당시 아무런 준비 없이 개경에 남아있다가 김부식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봉기 소식을 접한 인종은 진압을 명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진압 책임자가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개경에 남아 있던 정지상 • 백수한 • 김안을 우선 처형하고 왕에게 사후 보고한 뒤 서경으로 향했다. 전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이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에 보냄으로써 봉기는 그 에봉이 꺾였으나, 항복을 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조광이 끝까지 버텨 완전히 종결되기까지는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흔히 문벌귀족 대 신진관료의 대립,개경파 대 서경파의 대립,휴교 대 풍수도참설을 포함하는 고유사상의 대립,보수파 대 개혁파의 대립,사대 대 자주의 대립으로 도식화되는 묘청의 난에서 전자인 김부식 세력의 승리는 이후 고려 사회를 유교 중심의 문벌주의로 이끈다.

반란 진압 책임자로 공을 세운 김부식은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최고 권력을 차지했으나 그는 “부귀에 연연하여 물러가지 않으면 낚싯밥을 탐내다가 결국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니,마땅히 늙은 몸을 수습하여 어진 이가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겠다: 며 사직 상소를 세 번이나 올린 끝에 1142년(인종 20) 68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정습명이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고,정적인 윤언이가 중앙 정계에 복귀할 조짐이 보이던 무렵이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김부식은 인종의 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작업에 매달렸고, 인종은 하급 관리들이 일을 도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김부식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책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삼국사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중국의 경학이나 역사에는 상세하나 자기 나라의 역사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그것을 개탄하여 이 책을 편찬했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 이 책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지만, 몇몇 비난을감수해야 했다. 우선 자신이 신라왕족의 후예였던 이유로 인해 고구려나 백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반면 신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우호적이었디는 점,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서술함으로써 지배층 중심의 역사 서술이 회어 서민들의 모습이 담긴 전설, 설화 등이 무시되고,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배제하였다는 점,그리고 조선시대 사학자들보다야 덜 하지만 중국의 유교적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보았다는 점 등이 그 한계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공으로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에게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後)에 책봉되어 식읍 1,000호 등을 하사 받았으며,왕명을 받아《인종실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삼국사기》를 완성한 뒤 김부식은 6년을 더 살다가 1151년(의종 5)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평 가

김부식의 학식은 1123년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에 의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서긍은《고려도경》이라는 책을 펴냈는데,그 안에 김부식의 가계를 기록하며 ‘박학강식 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의 일에 밝아 학사들이 신복하고 있으며 그를 능가하는 자가 없다 고 기록했다. 또한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가 송나라 황제에게 보고하고 널리 배포하여 이후 김부식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간 일이 있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고려사》《김부식 열전》은 전한다.

이렇듯 조선시대까지 김부식에 대한 평가는《삼국사기》를 비롯한 그의 저술과 시문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의 호된 비난을 받으면서 김부식은 진취적인 고유사상을 말살시킨 흉악한 사대주의자로 전락하고 만다. 신채호는 <조선역사상 일천 년이래 제일대사건〉이라는 글을 통해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은 이후 조선의 온갖 병폐를 가져온 근원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삼국사기》는 사대주의에 물든 대표적인 역사서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책이라고 혹평했다. 민족의 자주를 외치던 신채호에게 사대를 정당화한 김부식은 배척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광복 이후에도《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김부식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논의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삼국사기》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씌어진 사서로 이전의 고대 사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사서이며,조선 전기의 역사서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덜 사대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사상을 말살하는 데 앞장선 사대주의자’라는 비난과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유학자로 우리 문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인물”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김부식이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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