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울리는 경부선-남인수///崔忠獻

bsk5865 2014. 11. 30. 08:3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1.30 06:27

 

울리는 경부선-남인수///崔忠獻(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307 


울리는 경부선-남인수


울리는 경부선-남인수

작사 남인수 작곡 반야월


연보라 빛 코스모스 눈물 젖는 프랫트홈
옷소매를 부여잡고 한없이 우는 고운 낭자여
구름다리 넘어갈 때 기적소리 목이 메어
잘 있거라 한마디로 떠나가는 삼랑진


달려가는 철로 가에 오막살이 양지쪽에
소꿉장난 하다 말고 흔들어주는 어린 손길이
눈에 삼삼 떠오를 때 내 가슴은 설레어
손수건을 적시면서 울고 가는 대구정거장


전봇대가 하나하나 지나가고 지나올 때
고향이별 부모이별 한정이 없이 서러워져서
불빛 흐린 삼등찻간 입김 서린 유리창에
고향 이름 적어보는 이별 슬픈 대전정거장


崔忠獻

다른 이름; 최난(崔鸞)

생애와 업적

아버지 김부식의 권세를 믿고 정중부의 수염을 춧불로 태운 김돈중,그리고 의종의 보현원 행차 때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젊은 문신 한뢰는 그 동안 쌓였던 무신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고려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무(武)보다는 문(文)을 숭상해 무인들이 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지 못했고,무관의 품계가 낮아졌으며,무인교육기관은 폐지되었다. 이들의 쌓였던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다. 정중부는 이의방 • 이고 등과 함께 문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태자를 진도로 귀양 보내고,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명종으로 맞이했는데,이 사건이 무신정변이다.

무신정변이 성공한 이후 고려 사회는 급류를 타는 듯했다. 초기 무신정권의 실권을 잡았던 이의방과 이고 사이에 갈등이 생겨 먼저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3년 뒤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했다. 다시 정중부가 26세 불과하던 청년장군 경대승의 칼 앞에 쓰러진 뒤 경대승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자 이의민이 집권했다. 이의민은 천민 출신에,의종을 시해한 인물이었다. 힘만 있으면 누구든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시기였다.

“이의민 부자는 나라의 역적이니 내가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데,어떻겠습니까?"

동생 최충수의 말에 최충헌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충수의 결심은 확고했고,최충헌도 결국 동의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의민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계기는 한 마리의 비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최충수가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를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빼앗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지영을 찾아가 항의해 결국 비들기를 다시 빼앗아오기는 했으나 그 원한이 남아 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최고 권력자를 제거할 모의를 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가 우리 역사상 드물게 역동적이었다는 반증 이기도 하다.

석가탄신일, 명종의 보제사 행차에 웬일인지 이의민이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의 별장 앞에서 기다리다 밖으로 나오는 이의민의 목을 베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최충헌 형제는 “역신 이의민은 일찍이 왕을 시해하는 죄를 범했고,백성들에게 갖은 횡포를 부리고 잔학을 일삼았습니다.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위하여 그들 무리를 토별 했으나,혹시 계획이 누설될까 왕께 미리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죄를 내리옵소서”라며 명종에게 사건을 보고했다.

명종의 인정으로 명분을 얻은 최충헌 형제는 본격적으로 이의민 잔당의 제거에 나서 한 달이 넘도록 피의 숙청을 벌였다. 그런 뒤 명종에게 10개 조의 개혁 책인 봉사 10조를 올렸다. 관원들을 줄일 것,권신(權臣)들의 토지를 환원시킬 것,승려들의 폐단을 금지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이 개혁안은 지금까지의 무선정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쿠데타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용이었을 뿐 그 실천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충헌 형제가 권력을 잡았으나 67세의 노회 (老會)한 왕은 만만히 다룰 상대가 아니었다. 집권 무인의 교체만 네 번을 경험한 명종은 이들이 정국(政局)을 이끌어가는 데 가장 큰 적이었다. 결국 최씨 형제는 강제 폐위를 선택했다. 왕의 친위 세력들을 먼저 제거한 뒤 왕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고,왕의 동복형제인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맞이하여 새로운 왕 신종으로 세웠다. 새로운 왕을 세운 뒤 최충헌은 비로소 무관 최고 계급인 상장군(上將軍)에 올랐고,최충수는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했다.

왕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모든 권력이 최씨 집안에 집중되자,최충헌과 최충수는 서로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 욕심을 부렸다. 최충헌이 이를 말리면서 형제 간의 싸움은 시가전으로 발전하여 최충헌의 승리로 끝났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부하들에게 목숨을 잃었고,최충헌이 이를 두고 부하들을 원망했다고 전해지나,어쨌든 이제 권력은 최충헌 1인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벼슬이 다 그의 손에서 결정되고,왕은 그저 형식적인 승인의 절차만 거칠 뿐이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의 뇌물이 최충헌 일가로 몰려들어 엄청난 축재와 사치로 이어졌다. 궁궐을 출입할 때에 따르는 시종들이 3,000명이나 되어 그 위세가 왕을 능가했다.

최충헌은 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심복처럼 자신을 도와온 조카 박진재가 지진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는 말을 듣자 다리의 힘줄을 잘라 귀양 보내는 등 때로는 냉혹하게,왕권을 제압하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관직 승진은 매우 더디게 하는 등 때로는 신중하게 이후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희종마저 폐위하여,두 명의 왕을 축출하고 네 명의 왕을 세우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권력을 누리다 1218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최충헌은 아버지가 상장군을 지냈고. 외조부 역시 상장군을 지낸 무반 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최충헌이 음서로 제수 받은 벼슬은 무반 직이 아니라 문반직인 도필리(刀筆吏) 였다. 또한 무신정변에도 가담하지 않아 무진들이 득세하던 시기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1174년(명종 4) 조위총의 난 때 반란군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나,이의민 제거 직전에도 그의 벼슬은 섭장군(攝將軍)이라는 한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 • 무반을 두루 경험한 이력은 과거 무인집권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봉사 10조를 올려 개혁을 주장한 것이나 이규보로 대표되는 문인들을 정치에 참여시킨 것 등은 그의 정치력이 과거 무인집권자들보다는 한 수 위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정도감(敎定都監)과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신변의 안전을 기하는 등 제도적인 치밀함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는 데에서 한걸음도 나o}가지 못했다는 점과 미숙한 외교로 몽골 군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점 등 최무신정권이 받고 있는 후세의 지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 가

최충헌이 죽자 모든 문무백관이 흰 옷을 입고 장례에 임했으며,그 성대함이 국왕과 다를 바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아들 최우에게 무사히 권력이 세습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후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4대 62년 동안의 최씨 정권이 막을 내리자,최씨 일족의 공신 칭호는 박탈당했고,노비와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처자와 일가붙이들은 죽음을 맞거나 귀양을 갔다.

무진정권이 끝난 뒤 최충헌에 대한 평가는 다른 무인집권자들과 마찬가지로 반역자로 낙인 찍혔다. 유교적 사관이 지배했던 우리 역사에서 왕권을 농락한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의 부정적 서술 때문인지 최충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유교적 사관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오직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최충헌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기는 쉽지 않다.

“최충헌은 미천한 데서 일어나 국명 (國命)을 혼자서 쥐고 마음대로 했었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했으며,벼슬을 팔고 옥사를 흥정했다. 심지어는 두 왕을 내쫓고 조신들을 수없이 죽였다. 큰 원망이 하늘에까지 뻗쳤는데도 목숨을 잘 보존하여 편안하게 천수를 누렸다. 천도(天道)의 알 수 없음이 이와 같단 말인가"

최충헌에 대한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


조위총의 난

서경유수 조위총이 1174년(명종 4) 무신정권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일으키자 서북 지방의 40여 성이 호응했다. 조위총은 이를 토대로 약 2년 간 중앙군에 맞서 싸웠다. 토벌군이 서경으로 들이닥치자 조위총은 금 나라에 절령 이북의 땅을 주겠다며 원병을 청했지만 실패했다. 지루한 공방 끝에 1176년 서경이 토별군에게 함락되고 조위총은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반란이 실패한 뒤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듬해 다시 봉기해 1178년 까지 싸웠다. 조위총의 난은 무신정권 내내 전국에서 일어난 노비와 천민 봉기의 계기가 된 사건이다.


교정도감

최충헌 이후 무신정권의 최고정치기관이었다. 1209년(희종 5) 4월 최충헌 • 최우 살해모의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다가,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정치기구가 되었다. 무신정권 초기에는 무신들의 회의기관인 중방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으나 최씨 정권에서는 교정도감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두머리인 교정별감은 최충헌 • 최우 • 최항 • 최의가 대대로 이으면서 정치를 독단했다.


도 방

무신정권기의 사병 집단을 말한다. 원래 경대승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설치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1179년(명종 9) 9월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경대승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집에 결사대 수백 명을 모아 긴 목침과 큰 이불로 침식과 행동을 함께했는데,이 결사대의 숙소를 도방이라고 불렀다. 경대승이 죽자 도방은 해체되고 그 무리들은 섬 애 유배되었다. 그 뒤 최충헌이 1200년(신종 3) 도방을 부활시켰다. 최충헌은 문무관. 한량 • 군졸 중에서 힘이 센 3,000여 명을 선발하여 교대로 자기 집을 호위 하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