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해운대 엘레지-손인호///恭愍王

bsk5865 2014. 12. 23. 14:26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2.23 05:58

 

해운대 엘레지-손인호///恭愍王(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440 


해운대 엘레지-손인호


해운대 엘레지-손인호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 히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말이
오고 또 가는 바닷물 타고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번 또 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


울던 물새도 어 데로 가고 조각달도 기울고
바다마저도 잠이 들었나 밤이 깊은 해운대
나도 가련다 떠나가련다
아픈 마음 안고서
정든 백사장 정든 동백 섬
안녕히 잘 있거라


恭愍王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활동분야:왕
다른 이름; 왕기(王祺),왕전(王顓), 빠이맨티무르(伯顔岾兒)


생애와 업적

1351년 12월,공민왕이 귀국했다.10년 만에 밟아보는 고국 땅이었다.가장 감수성 예민한 십대의 대부분을 타국에서 약소국의 인질로 지내며 그는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또 10년 만에 돌아오는 귀국길에서 어떤 다짐들을 했을까.

공민왕은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충혜왕과 조카 충목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제현 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건의했으나 원나라는 또 다른 조카 충정왕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열 살밖에 되지 않았던 충정왕이 다스리기에 고려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회가 혼란해 지려고 정치가 안정을 찾지 못하자 원의 순제는 3년 만에 충정왕을 폐하고 공민왕을 고려 제31대 왕으로 봉했다. 원나라가 고려의 왕을 언제든지 폐하고 세울 수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고려의 왕들은 원 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원나라도 차츰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즉위한 뒤 공민왕은 변발을 풀고 몽골풍의 의복을 벗어 던졌다. 원나라의 내정에 밝았던 공민왕은 원의 멸망이 멀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반원과 개혁이 시작되었다.

우선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이 인사 행정을 주도하던 정방(正房)을 폐지해 인사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친정(親政)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를 내리는 등 무신정권 이후 크게 위협받고 있던 왕권을 되찾고 민생을 돌보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고려는 친원 세력들로 구성된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차지하여 나라의 기반을 흔들고 있었다. 특히 공녀로 갔다가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씨 형제들의 횡포는 왕 앞에서 신(臣) 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거리낌이 없었다.

1356년 공민왕은 원나라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 던 기철 •권겸 •노책 일파를 숙청했다. 그리고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했으며,고려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정돔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했다. 또한 원나라 복속 이후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 하는 등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권문세족에 맞서 나라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믾은 힘을 기울였다. 이때 성리학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는데,이들을 선진사대부(新進士大夫)라 한다. 이들은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과 맞서며 반원친명(反元親明) 노선을 선택하는 등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동참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우선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기를 느낀 권문세족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즉위한 이듬해인 1352년 조일신이 일으킨 정변을 비롯해,1356년 기철 등의 역모,1363년 김용의 난,1364년 최유의 난 등 이들의 반발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국가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1361년 10만의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는 개경이 함락되어 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떠날 정도였다. 홍건적의 침입은,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원과 연합할 필요성을 느낀 공민왕이 그 동안 추진하던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돌려 놓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남해안과 경상도 일대에 침입하는 왜구들도 큰 걱정거리였다.

여기에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앓는 슬픔까지 겪는다 원나라의 공주였으나 예전의 원나라 공주 출신의 왕비들처럼 위세를 부리지 않았던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은 유난히 부부애가 좋았는데도 혼인 후 8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렵사리 공주가 임신을 하자 공민왕은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사를 내릴 정도로 기뻐했다. 그러다 난산 끝에 공주가 죽자 공민왕의 슬픔은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깊었다.

슬픔에 빠진 공민왕을 대신해 개혁의 칼자루를 권 사람이 신돈이다. 신돈은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어머니는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던 비천한 신분이었다. 어려서 출가했지만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다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궁중에 드니들게 되었다. 두뇌가 총명해 차츰 왕의 총애를 받게 되고,1364년부터는 왕의 사부가 되어 국정을 자문하면서 세력이 날로 커졌다.

공민왕은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사에 전념하며 신돈에게 정권을 맡겼다.“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천하여 친당이 없어 대사를 맡길 만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존의 권문세족들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신돈이라면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국사를 맡기려는 뜻을 신돈이 거절하자 공민왕은 “스승(신돈)이 과인을 구원하고 과인이 스승을 구원할 것이다.

죽고 삶을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됨이 없을 것이니 부처와 하늘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라는 맹세의 글을 손수 써주며 국정을 맡겼다.

신돈은 우선 최영 등 무장 세력들을 제거하는 정계개편을 단행헸다.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이들 무장 세력은 왕권을 위축시킬 정도였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보수적 성향을 지난 기득권층이었다. 공민왕은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신돈을 등용하여 이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 들을 중용했다.

그런 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토지를 강제로 빼앗긴 사람들에게 토지를 되돌려주고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良人)으로 되돌려주었다. 그 결과 신돈은 ‘정인이 나왔다”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지만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더욱 커졌다. 이들의 저항에 맞설 만한 권력기반이 신돈에게는 없었다. 또한 백성들의 신임이 날로 커지고 있는 신돈의 위세가 공민왕에게 점차 부담이 되었다. 권문세족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방패막이도 필요했다. 1371년 신돈은 역모죄로 붙잡혀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신돈이 제거되면서 공민왕의 개혁도 막을 내렸다. 이후 공민왕은 자주술에 취해 있거나 남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고려사》에 따르면,젊고 아름다운 귀족의 아들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구성해 늘 가까이 두던 공민왕은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이들에게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하게 한 뒤,후사가 생기면 자기의 대를 잇게 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익비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그 사실을 은폐하려다 오히려 이들의 손에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다섯,개혁의 의지가 꺾이기에는 아까운 나이였다. 이후 고려는 몰락의 수순을 밟는다.


평 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고려가 벗어날 수 있도록 힘쓴 자주적인 왕,신돈이라는 승려를 등용해 개혁을 추진하다 암살당한 비운의 왕,그리고 노국대장공주와의 애절한 사랑, 이것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공민왕의 모습이다.

공민왕은 무신정권과 원나라 지배기를 거치며 국력이 크게 쇠퇴한 고려를 중흥시키기 위해 애썼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려사》에 기록된 공민왕과 신돈의 모습들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이 쓴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공민왕과 신돈은 고려가 몰락할 수밖에 없도록 일조한 인물들이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천산대렵도》.《노국대장공주진》 . <석가출산상》 《아방궁도》 . 《현릉산수도》 . 《동자보현육아백상도》 등의 작품이 는데 오늘날 전하는 것은 《천산대렵도》뿐이다.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권문세족과 무신정권기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원 간섭기에 그 골격이 갖추어졌다. 충선왕이 왕실과 흔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정했는데,이들 기문이 곧 권문세족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상지종은 경주 김씨,정안 임씨,경원 이씨,파평 윤씨등 고려 초부터 계속돼온 명문가문들과 언양 김씨,평강 채씨 등 무신정권시대 무신으로 득세한 가문,그리고 당성 홍씨, 황려 민씨 등 무신정변 이후 성장한 가문,평양 조씨 등 대원관계 속에서 신흥 세력으로 성장한 가문들이었다. 이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으며,경제적으로는 농장 이라 불린 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항하여 등장한 새로운 사회 세력이 신진사대부이다. 신진사대부는 학문적 실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정치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였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로 대표되는 선진무장 세력과 손잡고 조선 왕조를 개창했다.


조일신

?~1352(공민왕 1 충선왕 때의 공신인 인규(仁規)의 손자이고,아버지는 충숙왕 때 찬성사를 지낸 위(瑋),어머니는 나주 나씨(羅州羅氏)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당시 인질이었던 공민왕을 보필했다. 공민왕이 귀국해 왕위에 오르자 일등 공신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친원 세력의 핵심인 기씨 일파와 갈등을 일으켰으며 각종 부당한 행위를 자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위기를 느낀 조일신은 1352년(공민왕 1) 9월 반란을 일으켰다.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죽이려 했으나,기원(奇轅)만 살해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갔다. 조일신은 왕이 기거하던 이궁(離宮)에 침입하여 관원과 군사들을 죽이고 왕을 협박하여 스스로 우정승이 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 변란의 책임을 그의 무리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왕에게 강제로 권하여 그의 무리 89명을 효수(梟首)하게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좌정승으로 내려앉았으나,더욱 방자하게 행동하다가 마침내 왕명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조일신의 난은 불과6일 만에 평정되었다.


김용

?~1363(공민왕 12). 공민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 모신 공로로 승승장구했다. 조일신괴는 사이가 안 좋았으나 왕의 보호로 무사했다. 조일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궁중에서 숙직하면서도 적을 막지 않고 홀로 무사했다고 해 유배되었으나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1362년 평소 사이가 나쁜 정세운이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공을 크게 세우자 이를 시기하여,안우(安祐)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한 다음,정세운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안우 또한 죽였다. 그 뒤 찬성사(贊成事)에 올랐으며,1363년 순군제조(巡軍提調)가 되어 흥왕사의 행궁에 머무르고 있던 왕을 시해하려다가 실패했다. 시해 음모가 실패하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잡힌 자를 모두 죽여 일등공신에 봉해졌다. 그러나 사실이 드러나 처형되었다.


최유

?~1364(공민왕 13). 1363년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에 불평을 품고 있는 자들과 기황후를 부추겨 공민왕을 폐하고 덕홍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모의했다. 다음 해 정월에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녔으나 최영과 이성계의 토별군에게 크게 패해 달아났다. 그 뒤 다시 고려에 침입하려고 원 황제에게 원정군을 내줄 것을 청했으나, 원나라의 감찰어사가 그의 간사함을 폭로하며 원정군을 정지할 것을 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원나라 황제는 그를 잡아서 칼을 씌워 고려로 돌려보냈고,고려에서 마침내 사형에 처해졌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