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三別抄)가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면서 대몽 항쟁이 막을 내린 이후 고려의 자주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몽골은 국호를 원(元)으로 바꾼 뒤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그에 필요한 물자와 군사를 고려에서 징발했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또한 원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왕실의 호칭과 격을 부마국에 걸맞게 낮추는 등 고려복속정책을 시행했다.
이렇듯 고려의 문화와 역사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연 은 민족의 자주 의식을 일깨우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심국유사》는《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281년(충렬왕 7)에 시작하여 1283년(충렬왕 9)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삼국사기》처럼 체계적이 지는 않지만,《삼국사기》에 실려 있지 않은 단군신화를 비롯한 고조선•부여•가야 등의 역사,민간설화,불교에 대한 내용들을 수록하여 우리의 역사 전통과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소중하고 풍부한 자료를 전해준다. 특히 다른 책에서는 전하지 않는 신라의 향가가 11수나 실려 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일연은 승과에 합격한 승려이다. 1206년 경상도 장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몸가짐이 단정했고 사물을 보는 눈빛이 남달랐다고 한다. 아흡 살 때부터 전남 해양의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했고,열네 살 때 설악산 진전사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했으나 비슬산 보당암에 머물며 몇년 동안 참선과 수행에 몰두했다. 이후 무주암에 머물며‘생계불감불계부증’이라는 구절을 탐구하다가 큰깨달음을 얻어“오늘 곧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의 일이다.
깨달음 뒤 선승으로 명성을 얻은 일연은 1237년‘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를 받고 1246년에는‘선사(禪師)’의 승계를 받았다. 일연이 공부를 하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의 시기는 몽골군의 침입이 있던 혼란기였으나 그는 절에서 참선에 몰두할 뿐 현실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승려로서 평탄한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러나 깨달음 뒤 점차 현실과 연을 맺기 시작한다.
1249년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의 처남인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의 정림사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약 3년 동안 대장경 판각 작업에 참여했고,1259년에는 조정으로부터‘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몽골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 조정을 따라 강화에 머물며 불법을 가르치기도 했고, 1268년에는 왕명을 받아 개경에 있는 해운사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모아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 를 주관하고 설법을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4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대몽항쟁이 끝나고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할 무렵에는 인홍사에 머물며 참선과 강론을 했는데,이때《역대연표》를 간행했다. 이 책은《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1277년부터 1281년까지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에 머물며《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듯하다. 일연이 청년 시절에 사료를 모아 70세 이후에 집필한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뜬 뒤 간행되었다.
1282년 일연은 왕의 간곡한 요청에、따라 입궐히여 대전에서 설법하고,광명사에 머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283년에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원경충조(圓經沖照) 라는 호를 받았다. 이름 없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왕의 극진한 예우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지방에 머물렀다.
1289년 충렬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새벽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문답을 나눈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입적했다.
현재 그의 탑과 비는 인각사에,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평 가
무신정권과 몽골 침입이라는 혼란기를 살면서 대 몽 항쟁이나 정치개혁에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삼국유사》라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일연은 역사적•문학적으로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사질《삼국유사》는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등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이 책들은《삼국유사》의 기록은 허황하여 믿을 바가 못 된다고 낮춰보았다.
그러나 현재는 한국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단군신화를 기록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의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민속이나 성씨록,지명의 기원,신앙,그리고 그 안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설화와 향가 들은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 등 많은 부분의 열쇠를 제공한다.
일제시대 역사학자인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된다면,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삼별초
무신정권 때의 특수군대를 말한다.1219년(고종 6)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秒)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그 뒤 야별초 숫자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우별초로 나누고,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해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국가 아닌 개인에 속한 사병적(私兵的)인 요소가 강했으나,대몽 항쟁 기에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삼별초는 크게 반발했다. 이들을 설득하려다 실패한 원종은 삼별초해산을 명령했고,이에 삼별초는 배중손(裵仲孫)을 지휘관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3일 뒤,근거지를 진도로 옮기고 전라도 일대를 제압한 다음,경상도의 남해,거제 등지와 탐라까지 공략하여 해상을 장악했다. 이듬해 5월 여원연합군의 공격에 배중손은 목숨을 잃고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삼별초의 항전은 1273년 여원연합군이 탐라를 평정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승과, 선사, 삼중대사
"958년(광종 9) 처음으로 과거제도가 실시 되면서 승려에게도 시험에 의한 출세 길을 열어주는 승과가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다가 선종(宣宗) 때 문관 시험과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시행하는 정기시험이 되었다. 선종선(輝宗選)과 교종선(敎宗選)으로 나누어 선종선은 선종의 승려를 뽑고,교종선은 교종의 승려를 뽑았는데, 시험과목은 선종은《전등록》,《점송》이고, 교종은 《화엄경》《십지론》을 보았다. 승과에 합격한 자에게는 대선(大選)이라는 초급 법계(法階)를 주고,선종•교종 구별 없이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까지 승진할 수 있게 했다. 그 이상의 법계는 구별이 있어 선종은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를, 교종은 수좌(首座). 승통(增統)을 주었다. 대 선사나 승통은 국사(國師). 왕사(王師)로 추대되어 국왕•국가의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같이 승과를 두었는데,선종선은 선과(禪科),교종선은 교과(敎科)라 했다. 불교탄압정책과 승과를 폐지하라는 유신(儒臣)들의 끈질긴 주장 속에서 연산군 때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1504년(연산군 10) 이후 중단되었고,1545년(명종즉위) 어린 명종의 섭정을 하게 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40년간 중단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켰으나,1565년 명종이 승과 제도 폐지를 명하면서 500년간 이어오던 승과 제도는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