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손인호 작사 천봉 작곡 한복남
一 잡는 손을 뿌리치며 돌아서는 그 사람아 너를 두고 짝사랑에 내 가슴은 멍 들었네 네가 잘 나 일색이냐 내가 못 나 바보 드냐 아~ 속 시원히 말을 해다오
二 말 못하는 이 내 마음 몰라주는 그 사람아 네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몰래 정 들었네 네가 잘 나 뽐내 드냐 내가 못나 싫은 거냐 아~ 속 시원히 말을 해다오
崔瑩
생몰년도: 1316년(충축왕 3)-1388년(우왕 14) 시호;무민(武愍) 활동분야:군사,정치
생애와 업적 1388년 명나라는“철령 이북과 이동은 본시 원의 관할에 속했으므로 그 지역에 있는 군인은 한인•여진•타타르•고려를 막론하고 명나라에 속한다”는 방을 붙였다. 본래 철령 이북 지역은 고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땅으로 삼아버렸다. 이를 공민왕이 회복하였는데, 명나라가 자신들의 영토로 살겠다고 통보를 한 것이다.
이대로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한 최영은 우왕을 설득해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당시 최영은 이미 일흔을 넘긴 백전노장이었다.
1316년 사헌규정(司憲叫正)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난 최영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났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아버지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남겼다는 유명한 일화를 제외하고는 성장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왕을 호위하는 우달치(迂達赤)에 임명된 뒤 1352년(공민왕 1) 안우•최원 등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여 이름을 얻었다.1357년(공민왕 6) 오예포(吾乂浦)에 쳐들어 온 왜선 400여 척을 격파하여 왜구를 섬멸하면서 이때부터 백성들 사이에 영웅으로 추앙 받기 시작했다. 또한 1359년과 1361년 두 번의 홍건적 침입 때 이를 격퇴하여 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김용의 난과 최유의 난을 진압했다.
싸움에 나가면 백전백승하는 고려 최대의 명장이었으나 신돈의 집권 뒤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던 신돈에게 최영은 타파해야 할 보수 세력이었다. 신돈의 침소로 관직을 빼앗기고 가산(家産)을 몰수당한 채 귀향을 가야 했지만 신돈의 실권하자 다시 관직에 복귀되었다. 최영이 탐라를 진압하러 간 사이 공민왕이 시해 당하고 그의 아들 우가 즉위하여 우왕이 되었다. 우왕의 즉위 뒤에도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최영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겠다고 청했다. 우왕은 싸움터에 나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만류했지만 최영은 "신이 비록 몸은 늙었지만 뜻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원컨대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가 치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간절히 청했다.
우왕의 허락을 얻은 최영은 그날로 달려가 왜구들이 진을‘치고 있는 홍산에 이르렀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최영이 몸소 선봉이 되어 돌진해가자 왜적들이 초목 처럼 쓰러졌다. 이때 적 한 명이 숲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서 입술을 맞혔다. 피가 많이 흘렀지만 최영은 태연히 그 적을 쏘아 쓰러뜨린 뒤에야 화살을 뽑았다. 이 모습에 힘을 얻은 군사들이 왜구들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를 홍산대첩이라한다. 이때부터 왜구들은 조선에서 정말 두려운 사람은 오직 백발의 최만호뿐”이라며 그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후 강화•통진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또한 승천부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우왕의 집권 뒤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최영은 수시중(守待中)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중앙의 중책을 맡고,이후 재상직인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가 문하시중에 오른다• 1388년 우왕은 최영이 반대하는데도 그의 딸을 비로 맞았다. 왕의 장인으로,그리고 정치적 동반자로 최영은 당시 고려 조정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최영의 요동 정벌 계획은 안에서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성계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우며 격렬히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도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에 임명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을 강행했다. 군대가 평양을 출발할 무렵 최영은“대군이 길에서 시간을 지체한다면 큰일을 성취할 수 없으니 제가 가서 단속하겠습니다”라며 청했다. 하지만 우왕은,“선왕(공민왕)이 피해를 당한 것은 그대가 남방으로 토벌하러 갔기 때문인데, 내 어찌 하루도 그대와 떨어져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말렸다. 이때 최영이 요동 정벌길을 떠났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이성계는 위화도에 머물며 다시 상소를 올려 군사를 돌릴 것을 청했다. 우왕과 최영은 단호히 거절했다. 요동군이 모조리 토벌에 나가 성이 비어 있으므로 우리 군대가 도착하면 싸우지 않고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를 이미 받았던 최영으로서는 군대를 돌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최영은 이성계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모았으나 주력부대 대부분이 정별군에 편성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최영은 얼마 버티지 못한 채 곽충보 등에게 잡혔다. 최영이 잡히자 이성계가 “이러한사태는 내 본심이 아니오. 요동공격이 정의를 거스르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혀 원성이 하늘에 닿았으므로 부득이하게 행한 일이었소. 잘 가시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은 전한다 왜적과 홍건적을 맞아 함께 전장을 누비던 두 사람의 장수가 이제 서로 다른 선택 끝에 그 승패가 엇갈린 것이다.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으로 귀양갔다가 뒷날 개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고,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평 가 최영이 죽던 날 개경 사람들은 시장을 열지 않았고 거리의 어린이 들이나 시골 부녀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또한 이는“최영은 성질이 강직하고 충실하며 또 청렴하였다.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 태연했으며 화살이 빗발같이 지나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는 규율을 엄격히 하여 필승을 기하였으며 전사가 한걸음만 물러서도 곧 목을 베었다. 그러기에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에서 어디서나 승리를 쟁취하였고 일찍이 패한 적이 없었다”라고 최영의 공을 인정했지만 그에 대한 비난도 함께 긹 했다.
“그는 성질이 우직하고 무식하여 일을 모두 자기 뜻대로 처리하였으며 사람을 죽이고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죄가 죽이기까지 할 것이 아닌데도 사형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공은 이 나라를 덮었고 죄는 천하에 가득하다”는 윤소종의 격렬한 비난도 덧붙였다.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에 대해 무한정 호의적일 수는 없는 게 새로운 왕조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반면 태종•세종 대 명문장가인 변계량은‘나라의 위엄 떨치는데 평생을 바치니/말 배우는 어린애까지 그 이름 아네/일편단심,응당 죽지 않아서/천년 동안 큰 산과 함께 남으리”라는 시를 남겨 최영의 공을 기렸다.
사불가론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반대하는 이유로 든 에가지 주장을 말한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둘째,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셋째, 요동을 공격하논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넷째,무덥고 비가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기에 불가하다고 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