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이인권 작사 유호 작곡 이봉룡
一 송도라 옛 터전에 달 빛도 차가운데 말 없는 바람 결에 소나무 우저기네 아느냐 충성의 피 흐른 곳 어드메냐 목 메여 묻은 말에 돌장이 들먹이네
二 바람이 잠 잔다고 날마저 흐렸느냐 선죽교 피 다리엔 벌(버)레만 우는 구나 몸이야 가셨지만 혼(魂)마저 가셨으니 정포은 이름 석 자 잊지야 않으리라
鄭夢周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시호;문충(文忠) 활동 분야: 정치,학문 다른 이름; 정몽란(鄭夢蘭)/정몽룡(鄭夢龍)
생애와 업적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성리학을 연구한 유학자로 그 학문이 깊고 외교에도 능했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해 관직에 나왔다.
그 무렵까지 고려에 들어온 유교 경전은《주자집주》가 있을 뿐이었는데,당시 성균관 박사로 있던 정몽주는 그 뜻을 유창하게 해석해 설명했다. 강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해석에 그의 학문을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그 뒤 들어온 책의 내용이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탄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대의 대학자였던 이색도 ‘정몽주의 논리는 그가 이러저러하게 함부로 하는 말도 모두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며 그를 우리나라성리학의 창시자로 인정했다.
또한 정몽주는 명나라나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세공을 늘리겠다고 통보해온 명 태조 주원장의 요구에는 직접 명나라 사신으로 가 오히려 5년 동안 미납된 세공을 면제받고 돌아오기도 했다.
1377년에 일본 사신 길에 오르기도 했는데,사실 이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친원 파들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당시 정몽주는 북원의 사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소로 인해 유배되어 있었는데,앞서 사진으로 일본에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일본 사신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그들을 교화시켰다. 일본은 그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정몽주는 귀국 시 수백 명의 포로들을 데라고 돌아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명나라의 법률제도를 연구하여 새로운 법제를 만들고 불의의 재해에 대비해 각지에 의창(義倉)을 짓기도 했다. 또한 관청에 경력도사(經歷都事)라는 회계관을 두어 경리사무를 정확히‘기록하게 하고,수도에는 5부 학당이라는 유학 학교를 세우고 각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위하여 힘을 쏟았다.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해왔을 때 친명파였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편에 섰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이성계와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가 이색• 권근 등 온건파들을 제거하려 하자 그들과 갈라선다.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하게 나타난 이상 더 이상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다. 고려 왕조 안에서의 개혁을 꿈꾸던 정몽주에게 역성학명을 도모하는 이성계는 함께할 수 없는 정적이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물고 있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 . <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려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 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 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변 고쳐 죽어 백골이 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히 안 이상 그를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평 가 정몽주의 일편단심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성계에 반대하다 죽음을 당했지만 조선 건국 후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조선의 왕들에게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이방원)은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권근의 건의에 따라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했으며,‘문충(文忠)’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몽주의 학문과 이념은 고려 말 당시 새로운 시대사조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조선 사회로 나가는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들여온 주자학이 정몽주에 이르러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자학 성리학은 사림파에게로 이어져 조선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1517년(중종 12)에 태학생 등의 상소에 의하여 문묘에 배향되었고,묘에 비석을 세웠는데,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했다.
또한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 되었고,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영천의 임고서원 등 몇 곳의 서원에 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의창 농민 구제를 위하여 각지방에 설치한 창고.고구려에서는 194년(고국천왕 16)부터 매년 3~7월에 기구 수에 따라 나라에서 독식을 빌려주고 10월에 돌려받았다. 고려시대에 태조가 흑창(黑倉)이라 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돌려받는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했는데,986년(성종 5) 흑창의 곡식을 1만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 라했다. 이것이 최초의 의창이다. 조선도 고려의 의창제도를 계승하여 봄에 식량과 씨앗을 벌려주고 가을에 돌려받았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