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남인수 작사 조명암 작곡 이봉룡
一 세상은 넓다만은 남매는 단둘이다 언제나 같이 살자 빌든 맹서가 바람에 날렀느냐 구름에 쌓였느냐 그리운 그날 밤에 그 항구 그 이별
二 부엉새 울어 울어 단잠을 깨고 나니 귀여운 내 얼굴이 눈에 어린다 꿈속에 잠겼느냐 별 속에 숨었느냐 그리운 그날 밤에 그 설음 그 눈물
三 꽃피는 봄철이나 새우는 아침이나비 맞은 참새 처럼 갈 곳도 없이 어디서 울고 있나 혼자서 떨고 있나 날러 간 그 행복에 얄궂은 그 운명
李滉 생몰년도: 1501년(연산군 7)-1570년(선조 4)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퇴도(退陶) 시호; 문순(文純) 활동분야: 학문
생애와 업적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고 성리학적 이념을 국시로 천명했지만,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세력인 사림들이 집권 과정에서 흘렸던 피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하면서 사림의 시대,성리학의 시대가 자리 잡는 듯했지만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조광조가 숙청당한 기묘사화 당시 이황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 무렵 이황은 가르쳐주는 이도 없이 혼자 공부하며 학문적 단계를 높여가고 있었다. 경북 예안군에서 이식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앓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열두 살 되던 해부터 명종 대의 대표적인 사림이었던 속부 이우 밑에서 《논어》를 시작으로 학문을 익혔다. 《논어》를 배우던 어느 날 이황이 문득 “무릇 일의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라고 물으니,숙부가 기뻐하면서‘너는 이미 글 뜻을 이해하였다”며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러나 열일곱 살 되던 해 숙부마저 세상을 떠나자 스승 없이 대부분을 독학했다.
열아홉 살 때《성리대전》을 읽고 스물한 살 때《주역》을 공부했는데,이 무렵 지나친 학문 탐구로 건강을 해쳐서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렇듯 학문에 정진했지만 과거시험과는 인연이 좋지 않아 문과에 최종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것은 서른네 살이 되어서였다.
그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기까지 순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두 차례나 성균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제자들을 길러냈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제학(大提學)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마흔세 살이 되던 1543년부터 이황은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전개된 외척정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든,어린 시절 조광조의 몰락을 바라보나 대왕대비가 임금을 대신하여 정시를 돌보던 일 며 느꼈던 상실과 충격 때문이었든, 이황은 관직을 계속 밀어내려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현실 정치보다 학문적 성취와 제자 양성에 더 많은 뜻을 두었던 것일까.
고향으로 돌아온 이황은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쪽 바위에 양진암을 짓고,그곳에 머무르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때 시냇가의 이름을‘퇴계’라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퇴계는‘물러가는 시냇물’이라는 뜻인데,‘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어진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자주 왕이 불렀으나 이황은 사양하고 물러나려 애썼다. 왕의 부름에 관직에 나아갔다가도 사퇴하기를 반복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성리학에 대한 학구열과 관심이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컸던 듯하다.
이황은 우주 현상을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는 주자의 철학을 계승했다. 그는‘이’ 는‘기’ 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이고,‘기’는‘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존재라고 했다. 이’와‘기’는 같은 비중으로 상호 작용을 하지만(이기호발설: 理氣互發說),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이기이원론적 입장이었다.
인간의 바람직한 품성인 측은지심(測隱之心). 수오지심(垂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등 사단(四端)은‘이’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반면 희(喜). 노(努). 애 (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 등 보통의 감정인 칠정(七情)은‘기’의 작용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단은‘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으로 순수한 선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이’가 드러나는 것으로 선과 악이 혼재해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사단이 칠정을 이끌어가면 도덕적 행동이 되지만 칠정이 앞서면 부도덕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단이 마음의 중심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해야 도덕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황의 이론은 주희의 이기론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성리학을 인성론에 적용시키는 독창적인 것으로,외래사상인 성리학이 이황에 이르러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 되고 조선에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자신의 학문적 성취와 함께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어 국가의 지원 속에 학자들이 공부할 수 있게 했고,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도산서원을 일으켜 제자들을 양성했으며,관직에 있을 때는 성균관대사성의 자리에 있으면서 제지들을 길렀다.
명종은 이황이 계속해서 관직을 사양하자“어진 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탄식한다”는 제목으로 유생들에게 글을 짓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은밀히 화공을 보내 이황이 머무는 곳의 풍경을 그려오게 해서 당시의 명필인 송인을 시켜 이황이 지은〈도산기> . <도산잡영〉을 그 위에 쓰게 하고는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쳐다보며 이황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이황은 왕의 스승으로 대접받고 그의 제자들이 조정에 대거 등용 되어 사림정치의 기반이 다져졌다.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을 마지막으로 관직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이황은 어린 왕을 위해 <부전육조소>와 <성학심도>를 지어 바쳤다. 이 가운데〈성학십도〉는 성리학의 대강을 열 가지 도설(圖說)로 엮은 것으로, 최고 통치자인 제왕이 해야 할 치열한 자기 연마와 인격 완성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노학자가 어린 왕을 위해 평생 공부한 것을 풀어준 선물이었다.
낙향한 다음 해 감기에 걸려 고생하던 이황은 일어나 앉은 자세로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죽기 나흘 전 자신의 묘 앞에 세울 비문의 내용을 손수 지어서 남겼으며, 죽던 날 아침에는 서재에 있는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는 얘기도 전한다.
평 가 이황의 부음을 듣고 선조는 곧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으로 작위를 올려주었으며 ,5년 뒤에는 도산서원을 세워 사액하고 시호를 문순이라 올려주었다.
이황의 학문은 우리나라 학술사상사에 갚은 발자취를 남겼다. 감성일•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제자가 그의 학문을 계승해 영남학과를 형성했고,이들은 조선 후기 사회에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이황의 저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근세 유학을 연 후지하라 세이가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6년 이후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코 등지에서 국제 퇴계학회가 열리고 있는 등 이황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했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라는 선조 대의 문신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문적 지위를 간결하게 표현해주는 적절한 평가이다.
문정왕후 1501 ~1565. 조선 중종의 계비.1517년(중종 1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명종의 어머니 이다.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 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동생인 윤원형(尹元衝)에게 정권을 쥐게 했으며,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 등을 사사했다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불교의 부흥을 꾀했다.
백운동서원 15421건(중종 37)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서원.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이다. 그 뒤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편액(扁額)과 《사서오경》,《성리대전》등의 책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기운데 하나이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