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김정구 작사 왕평 작곡 전수린
一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二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三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趙光祖 생몰년도: 1482(성종 13)-1519(중종 14)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활동 분야: 정치,학문
생애와 업적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걸고 정변이 일어나 중종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반정 당일 자신의 집을 둘러싼 반정 군을 연산군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보낸 군사로 알고 자결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반정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고,따라서 실권도 없었다.
자연히 중종 초의 정국은 반정에、공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이 주도했다. 세조 대부터 공신으로 책봉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훈구 세력들은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을 위해 공신 전까지 몰수하려 하자 왕을 바꿀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중종은 이들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른 인물이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34세 되던 1515년(중종 10)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薦擧)와 이조판서 안 당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젊은 나이였지만 당시 사림학자들 사이에 네 추앙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조광조는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성균관의 천거를 받은 바 있는 인재였다.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 8월 10일 한성에서 훗날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조원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일곱 살 되던 해 인생의 큰 스승을 만난다. 지방 관리로 나갔던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김굉필을 처음 만나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김굉필 은 정몽주「길재-김종직을 잇는 영남사림의 핵심 인물로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유배 중이었다. 스승의 도학에 매료된 그는 성리학에 몰두했다. 이런 그를 보고 연산군 대의 사회를 겪은 당시 사람들은 화를 안고 있는 존재라는 뜻의‘화태(禍胎)’라 부르며 멀리했지만,조광조는 신념을 꺾지 않고 학문에 몰두했다.
관직에 진출한 그해 과거에 급제한 조광조는 정6품 성균관의 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헌부 감찰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는 등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사실 조광조가 정치 활동을 한기간은 4년에 지나지 않는다.그 짧은 시간 동안 매우 영향력 있는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 무렵 사림 세력은 소릉 복위 문제,노산군에게 제사를 지낼 후손을 세우는 문제, 사육신의 복권 문제 등을 제기하며,단종 폐위의 부당성과 세조의 집권 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형성된 훈구 세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림의 문제 제기는 중종의 폐비인 신씨의 복위 문제로 이어졌다. 중종 비 단경왕후는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반정 직후 정국공신들에 의해 폐출되었다. 1515년 계비인 장경왕후가 죽자 사림은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사림 세력이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것은 중종반정 당시 공신들의 정당성을 문제 삼기 위해서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상소가 올라오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상소를 올린 이들을 문초해야 된다고 건의했고,이들의 강경한 주장은 결국 상소를 올린 이들을 유배 보내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사간원 정언에 임명 된 조광조는 정언이 되고 이틀 뒤,기존의 사헌부•사간원 관리들 이 언로(言路)를 막았으니 이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이들을 모두 파직시킬 것을 요청했다. 치열한 싸움의 결과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었고,이후 조광조는 사림입신 망과 중종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런 뒤 조광조가 중심이 된 사림은 개혁을 단행한다. 우선 향약(鄕約)을 실시하여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키려 했다. 또한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학문괴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제도가 바로 賢良科(현량과)인데,훈구파의 격렬한 반대에도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된 결과 신진 사림 세력들이 대거 정계에 등장해 조광조의 지지 기반이 형성되었다.
현량과 실시로 세력을 확대한 사림은 중종반정의 공신들에게 직접 칼을 들이댔다. 공신 책정 당시 논공행상이 지나쳤으므로 위훈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을 세우지도 않고 공신이 된 70여 인을 공신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여기서 사림 세력이 이길 경우 조정은 완전히 사림이 장악할 것이다. 이는 중종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중종은 사림과 훈구 ‘양쪽의 균형을 바랐다. 하지만 사림은 중종을 압박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고,훈구세력의 반발이 있었지만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76명의 훈작이 삭탈일보직전에 놓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훈구 세력들은 강하게 반발했고,중종도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중종의 의중을 파악한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실행에 옮겼다. 사림 세력으로부터 소인배로 비난 받던 남곤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등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는 듯이 알렸다. 그리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감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했다 주초는 조(趙)를 분리한 글자로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중종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남곤과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성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이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조광조의 과격정과 급진성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이 이를 받아들여 사림들을 대거 투옥한 뒤 사사하거나 유배 보낸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조광조는 영의정 정광필의 비호로 겨우 목숨을 건져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으나 결국 사약을 받았다. 사약을 받은 조광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이렇게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불과4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광조가 주창한 도학정치는 뒤에 이황 •이이에게로 연결 되었고 조선시대의 풍습과 샘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중요한 계기가되었다.
평 가 조광조를 복권해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중종 대에 이미 제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조광조는 나라를 어지럽힌 '괴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조광조윈 복권과 현량과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점점 거세어졌다. 중종은 끝내 자신이 묶은 매듭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고,그 뒤를 이은 인종이 “조광조 등의 관직을 모두 회복시키고,현량과 급제자도 다시 등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복권이 정식으로 이뤄진 것은 선조 대에 와서이다. 선조는 “죽은 대사헌 조광조는 세상에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성품을 지녔으며 도학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대유(大儒)가 되었다”고 칭송하는 전교와 함께 벼슬과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광해군 2년 성리학의 본질을 터득하고 격물치지성의정심(格物致知誠意正心)의 공을 이룩한 사람’ 이라는 공적으로 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로써 조광조는 조선 왕조의 성리학사에서 가장중심적인 인물로 부활했고,성리학의 위대한 순교자로 성인의 지위에 올랐다.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가 화를 입은 사건. 김일손의 사초가빌미가 되어 발생했다. 사림피는 훈구파와 대립하고 있었는데,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실록청(實錄廳) 당상관이 된 훈구파 이극돈이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에게 고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꿈에서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을 보고 그를 애통해하며 지은 글이다. 이를 회왕은 단종을,항우는 세조를 의미하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결국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처형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향약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시행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의 예속(禮俗)을 보급하고,농민들을 결속 시킴으로써 체제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이황,이이 등은 《여씨향약》의 강령인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예속을 서로 권장하고,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마련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