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を恋ふる歌-森繁久弥 作詞 与謝野鉄幹 作曲 不詳
一 妻をめとらば才たけて みめ美わしく情けある 友を選ばば書を読みて 六分(りくぶ)の侠気四分(しぶ)の熱
二 恋の命をたずぬれば 名を惜しむかな 男(おのこ)ゆえ 友の情けをたずぬれば 義のあるところ 火をも踏む
三 汲めや美酒(うまざけ) うたひめに 乙女の知らぬ意気地(いきじ)あり 簿記の筆とる若者に まことの男 君を見る
四 ああ われダンテの奇才なく バイロン ハイネの熱なきも 石を抱(いだ)きて野にうたう 芭蕉のさびをよろこばず
五 人やわらわん 業平(なりひら)が 小野の山ざと 雪をわけ 夢かと泣きて歯がみせし むかしを慕うむら心
六 見よ西北にバルカンの それにも似たる国のさま あやうからずや 雲裂けて 天火(てんか )一度(ひとたび)降らんとき
七 妻子を忘れ 家を捨て 義のため恥を忍ぶとや 遠くのがれて腕を摩(ま)す ガリバルディや今いかに
八 玉をかざれる大官(たいかん)は みな北道(ほくどう)の訛音(なまり)あり 慷慨(こうがい)よく飲む三南(さんなん)の 健児は散じて影もなし
九 四度(よたび)玄海の波を越え 韓(から)の都に来てみれば 秋の日かなし王城や 昔に変る雲の色
十 ああわれ如何(いか)に ふところの 剣(つるぎ)は鳴りをひそむとも 咽(むせ)ぶ涙を手に受けて かなしき歌の無からめや
十一 わが歌声の高ければ 酒に狂うと人のいう われに過ぎたるのぞみをば 君ならではた 誰か知る
十二 あやまらずやは 真ごころを 君が詩いたくあらわなる 無念なるかな 燃ゆる血の 価(あたい)少なき末の世や
十三 おのずからなる天地(あめつち)を 恋うる情けは洩らすとも 人をののしり世をいかる はげしき歌をひめよかし
十四 口をひらけば嫉(ねた)みあり 筆を握れば譏(そし)りあり 友を諌(いさ)めて泣かせても 猶(なお)ゆくべきや 絞首台
十五 おなじ憂いの世に住めば 千里のそらも一つ家(いえ) 己(おの)が袂(たもと)というなかれ やがて二人の涙ぞや
十六 はるばる寄せしますらおの うれしき文(ふみ)を袖にして きょう北漢(ほくかん)の山のうえ 駒立て見る日の出(い)づる方(かた)
歌の背景 이 노래는, 自身의 心情•侠気를 아는 벗에게 바치는 노래인 것으로 알려집니다.
与謝野鉄幹(よさのてっかん), 本名은 寬입니다, 明治6年(1873), 京都의 절(寺)에서 4男으로서 태어나. 19歳에 上京하여, 和歌를 落合直文(おちあいなおぶみ)에게서 師事받으며 배워, 歌人(노래를 잘 짓는 사람)•詩人으로서 活躍하였으며. 明治28,29年에는 韓国으로 건너와 政治運動에도 加擔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鐵幹의 詩는 韓国에 건너 왔을 때부터 自由奔放하게 情熱的인 個性을 보이기 始作했다고 일컬어져, 이 「人恋うる歌」에는, 清日•露日戦争의 中間時期에 있었던 日本의 世情을 내보인 壮士的•英雄主義的인 狀態가 느껴집니다. 그 것이 旧高等学校 学生의 気概에 通해, 이 노래가 오래도록 그들 사이에서 불러 이어진 理由엿던 것일 것입니다.
鐵幹은 明治32年에 落合門下를 떠나 新詩社를 設立하고, 다음해에 「明星」을 発行합니다.
明治34年에 鳳(ほう)晶子와 結婚했습니다. 그 後 함께 詩作의 創作에 힘쓰고, 短歌를 새로운 定型抒情詩로서 展開하고, 浪漫主義的인 色彩를 더 힌 作品을 많이 「明星」에서 発表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与謝野鉄幹을 与謝野晶子의 男便으로서만 認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島崎藤村나 土井晩翠와 거의 같은 時期에 新体의 詩를 創作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明星」에서 海外의 詩를 中心으로 한 新文学의 紹介에 努力하고, 日本浪漫主義文学의 母体의 役割을 다한 것을 알고, 그의 功績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鉄幹은 後에 慶応大学, 文化学院 등에서 教授를 歷任하며 学究的인 生活을 보내다가, 昭和10年 (1935年) 3月, 東京에서 死亡하였습니다. 享年 62歲이었습니다.
「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의 詩로 有名한 与謝野晶子(よさのあきこ)는, 3번째의 아내로. 明治28年(1895), 招待되어 漢城(現在 서울)의 日本語学校「乙未義塾」에서 教師로서 在韓 中인 明治31年(1898)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1番「侠気」는, 괴로워하는 弱者를 못 본 체할 수 없는 것 같은 気分,
2番「義」는, 남에게 지켜야 할 옳은 길, 사람으로서 해야 할 事項, 大義.
3番「うたひめ」는 妓生을 指稱합니다. 妓生은 宮中에서 시중드는 女子 演藝人이지만, 日本의 植民地主義的 進出과 함께 高級娼妓의 色彩를 띠게 되었습니다. 「うたひめに乙女の知らぬ意気地あり」는, 憂國의 至情을 가지는 妓生인 것을 示唆하고 있습니다. 日本의 幕府末期, 京都에서 勤王倒幕의 支社를 도운 勤王妓生에게 比해야 할 存在인가? 「簿記の筆とる若者」는, 鉄幹이 韓国에서 서로 알게 된 志士的인 人物을 指稱한다고도 됩니다.
4番「ダンテ」는 Renaissance의 先驅가 된 Italy의 詩人(1265∼1321)으로. 代表作은 『神曲』『新生』. ダンテ를 「コレッジ」라고 하는 ヴァージョン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앞장섰는지는 不明합니다.
「コレッジ」는 英國의 詩人 콜리지(Coleridge)(1772∼1834). 콜리지(Coleridge)보다 「コレッジ」의 쪽이 原音에 가깝네요. 幻想的인 作風으로 浪漫主義의 先驅가 되었습니다.
「バイロン」은 英國 浪漫派의 代表的 詩人. 反俗의 靑年貴族으로서 유럽大陸을 遍歷하고, 그리스 独立戦争에 合流해, 客死했습니다 (1788∼1524).
「ハイネ」는 獨逸 浪漫派의 詩人. 代表作은 『歌の本』等 (1797∼1856). 「芭蕉のさびをよろこばず」의 「ず」은, 否定의 助動詞가 아니고, 意志•推測의 助動詞. 「むず」는 中世以後 「うず」에 変化되고, 더욱 「う」가 떨어져서 「ず」만큼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意志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芭蕉のさびをよろこばない」가 아니고, 「芭蕉のさびをよろこぼう」라고 하는 意味가 됩니다.
「さび」은, 一般的으로는 「古びて枯れた味わい」이지만, 芭蕉의 俳諧用語 로서는, 句中에 있어서의 「深くかすかな趣、閑寂な情趣」를 말합니다.
5番「業平」는 平安初期의 歌人• 在原業平(ありわらのなりひら) 六歌仙、三十六歌仙의 한 사람.業平가 比叡山 기슭• 小野의 山을 訪問한 것은, 그가 臣下로서 從事하고 있었던 惟喬(これたか) 親王. 文徳天皇의 第一皇子로, 剃髮해서 小野에게 隠棲하고 있었습니다. 俗說에서는, 藤原氏가 推薦하는 異腹男同生과의 立太子 다툼에서 졌기 때문, 剃髮• 隠棲했다고 합니다. 韓国内의 政治的 不遇者에 對한 同情을 惟喬親王의 運命에 포개서 읊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番「バルカン」은 발칸(Balkan)半島. 民族 大移動의 옛날부터 民族紛争이 되풀이되어, 第一次世界大戦의 発火点이 되었습니다. 最近에도, 旧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에서, 悽慘한 民族紛争이 繼續되었습니다. 日本과 러시아와의 勢力 다툼의 標的이 되어서 흐트러지고 있었던 朝鮮半島의 政治狀況이 발칸의 歷史에 포개져 있습니다. 한편, 鉄幹에 對해서는, 韓国滞在中,日本帝国主義의 立場에 서서 壮士的活動을 했다고 하는 所聞이 있습니다.
7番「ガリバルディ(Garibaldi)」는 이탈리아의 軍人으로, 小国에 分裂되고 있었던 이탈리아를 統一로 引導했습니다 (1807∼1882). 가리발디(Garibaldi)에게 比喩할 수 있는 것 같은 人物이 当時의 韓国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8番「北道」는 韓国 北部의 黄海道 平安道 咸鏡道를 좋은, 三南쪽은 南部의 忠清道•慶尚道•全羅道를 가리킵니다. 「訛音」은 둔해지고, 方言. 「慷慨」는 世上 일이나 自身의 運命을 憤慨해 恨歎하는 것이며.
9番「韓の都」는 韓国의 首都 서울. 朝鮮時代는「漢城」, 1910年의 韓日併合 後는「京城」으로 呼称되어, 1945年의 解放 後 다시 서울이 되었습니다.
16番「北漢」은, 서울의 북녘 北辺에 있는 北漢山을 가리킵니다. 서울市를 둘러싸는 山에서는 가장 높게 눈에 띄는 山으로. 옛날의 城壁이 남아있고, 北漢山城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北漢山은 대단히 険하고, 頂上까지 말(馬)로 오르는 것은 도저히 無理이므로, 「北漢」은 城址를 指名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