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田春秋-島津亜矢 作詩 星野哲郎 作曲 市川昭介
一 東へ西へ 乱れ飛ぶ 浮薄が雲の 知恵ならば 動かぬ山の 姿こそ 男と仰ぐ 武田武士 武田武士
二 着流す雲の 白砂を 夕日に翳し ゆく春の 恨みは人に 被せまいぞ 人生独り 富士の山 富士の山
三 喜ぶ人の ために耐え 悲しむ友の ために立つ 男の秋は 火と燃えて 山河を染める 甲州路 甲州路
天下の独眼竜,伊達政宗 伊達政宗(だてまさむね=1567年~1636年)는 日本 戰國時代 奧州의 戰國大名이자 江戸時代 仙台 藩의 始祖입니다. 伊達家門 第16代 当主 伊達輝宗와 最上義守(もがみよしもり)의 딸 義姬(よしひめ, 最上義光의 女 同生)사이에서 1567年(永禄10年)8月3日 長男으로 태어났습니다만 1571年, 天然痘로 오른쪽 눈을 失明합니다.
어릴 적 이름은 梵天丸(ぼんてんまる)이고, 字는 藤次郎(とうじろう)입니다. 諡號는 貞山, 本姓은 藤原 氏입니다. 神號는 武振彦命(たけるひこのみこと)로서 青葉神社에서 祭祀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 天然痘 앓아 그 後遺症으로 오른쪽 눈을 失明하여 後에 独眼竜(どくがんりゅう)란 異名을 얻게 됩니다. 한편 片倉景綱가 容貌가 안 좋아 오늘 눈을 短刀로 뽑아버렸다는 一說도 있습니다.
諱인 “政宗”는 伊達家 中興의 先祖로 알려진 室町時代 第9代 当主 大膳大夫 政宗와 같기 때문에 이를 区別하기 爲해 藤次郎政宗(とじろうまさむね)로 부르는 境遇도 많습니다.
以後 그의 어머니는 몰골이 추하다 하여 政宗를 멀리했고 代身 同生인 小次郎(本名 伊達政道)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답니다.
1584年(天正12年) 아버지로부터 家門을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85년 (天正13年) 二本松義継(にほんまつよしつぐ)가 아버지와 會見 後 그를 拉致 하여 人質로 내세우자 아버지 輝宗를 包含하여 義継 一行을 沒殺시켜버립니다.
이에 不安을 느낀 佐竹義重(さたけよししげ)가 같은 勢力을 糾合하여 쳐들어 온 人取橋の戦い 戰鬪에서 勝利하며 独眼竜이라는 別名까지 얻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信長가 죽은 1582年 以後 家門을 물려받은 탓에 獨自的인 勢力을 크게 펴지 못하고 豐臣秀吉, 德川家康 兩大 政權에 屈伏하고 以後 江戸幕府에 協力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툭하면 “10年만 빨리 태어났으면 天下는 내 것일 텐데.”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伊達政宗의 境遇, 壬辰倭亂에 參戰하여 1593年 4月 釜山에 上陸하여 名古屋의 大本營으로 돌아온 9月까지 晋州城 等地에서 戰鬪를 하였습니다. 朝鮮으로 出兵할 當時 伊達家의 部隊의 行列이 華麗하다고 所聞이 돌았고, 數는 3000名, 혹은 1500名이었다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다른 軍이 通過할 때, 조용하던 京都의 住民도 伊達軍이 지나갈 때 그 華麗함에 歡呼聲을 질렀다고 합니다. 以後, 華麗한 治粧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 伊達者'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豐臣秀吉 死後, 德川家康와 政宗는 秀吉의 遺言 中 하나인 大名의 子女끼리의 結婚은 하지 말라는 遺言을 깨고, 1599年, 長女 五郎八姫(いろはひめ)를 家康의 6男과 松平忠輝(まつだいらただてる)와 結婚시켰습니다.
関ヶ原の戦い 當時 東軍에 붙어 德川家康의 便이 되고 德川家康의 要求事項에 따른다는 約束下에 德川家康는 伊達政宗에게 石高(こくだか) 100万石을 保證 받았으나, 伊達政宗가 이 約束을 제대로 履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関ヶ原の戦い 期間 내내 石高에 대한 欲心을 버리지 못하고 上部의 命令과 相關없이 제멋대로 兵力을 일으키는 等 허술하게 處身하여 結局 戰鬪 後 伊達政宗에게 德川家康가 했던 100万石의 約束은 白紙化하여 버렸습니다. 德川家康는 伊達政宗의 石高를 57万石에서 62万石으로 若干 引上해 주는 線에서 伊達政宗에 對한 論功行賞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天主敎 信者였으나, 1614年, 大坂 夏の陣 에서 天主敎 神父를 武力으로 威脅하고 심지어 自身의 陣營으로 찾아 온 天主敎 信者를 虐殺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天主敎 信者인 것보다 政治的으로 利用했던 것 같습니다.
《看羊錄》에서는 눈이 외눈이고 倭將 中 가장 陰凶하고 邪惡한 者라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그는 壬辰倭亂에 參戰한 武將으로서 壬辰倭亂에 該當되는 戰鬪 中 많은 朝鮮사람이 불에 태워 죽인 晋州城 戰鬪에 그도 있었답니다.
伊達政宗는 暫時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典型的인 輕率한 스타일의 人物로 指摘되고 있습니다. 勿論 24살 때 이런 氣質 德分에 羽州의 覇權을 掌握하긴 했지만 反面 関ヶ原の戦い 때에는 德川家康에게 協力하면서도 德川家康가 意圖하는 대로 行動하지 않고 스스로 封地를 獲得하려고 無理하게 軍隊를 일으켜 結局 德川家康가 約束했던 100万石은 이런 伊達政宗의 行動과 相殺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툭하면 '내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내가 全國의 覇者가 되었을 텐데...'라고 하며 恨歎해 德川家康나 豐臣秀吉의 心機를 건드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自身이 大名의 身分으로서 前田利家(まえだとしいえ)의 조카 前田利益(まえだとします)에게 그런 点으로 訓戒를 듣고도 이렇게 天方地軸으로 날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