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느냐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달빛에 길을 물어 꿈에 어리는 꿈에 어리는 항구 찾아 가거라
二 흐르는 주마등 동서라 남북 피리 부는 나그네야 봄이 왔느냐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꽃 잡고 길을 물어 물에 비치는 물에 비치는 항구 찾아 가거라
許浚
자; 청원(淸源) 호: 구암(龜巖) 활동분야;의학
생애와 업적
임진왜란으로 큰 혼란을 겪던 조정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잠시나마 한숨을 돌리고 있던 1596년(선조29) 선조는 허준을 불러 명했다.
“요즘 중국의 방서를 보니 모두 자잘한 것을 가려 모은 것으로 참고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너는 마땅히 옹갖 처방을 덜고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라"
그러면서 새로 지을 책의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다 첫째,사람의 질병이 조섭을 잘 못해 생기므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할 것 둘째 처방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요점을 추리는 데 힘 쓸것,셋째,국산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알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왕명을 받은 허준은 정작•양예수-김응탁•이병원•정예남 등 당대의 인재들과 함께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정유왜란이 일어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가 1601년 무렵 다시 재개되였다. 이때부터는 허준이 단독으로 작업했는데,14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공들여 쓴 책이《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을 쓰는 동안 허준의 인생은 절정과 몰락을 경험한다. 사실 허준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그의 일생을 추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가 허준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은 소설과 드라마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이다.
허준은 제법 권세 있는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허론은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고, 어머니 김씨는 허론의 첩이었지만,양반 가문의 서녀였을 뿐 천민은 아니었다. 공부하는 데 크게 어려움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두루 밝았다”고 한다.
허준이 무슨 이유로 의학을 택했고,누구 밑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선조 때 유학자인 유희춘의 문집에 본인과 일가의 병 치료에 허준이 침여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허준의 의술이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희춘의 천거로 허준은 내의원 관직을 얻는다. 처음 받은 관직은 종4품 내의원 첨정(僉正)이었다. 아마도 서른한 살에서 서른세 살 정도의 나이였던 것 같다. 의과도 통과하지 않았고 더구나 서자 출신이었음을 감안할 때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이다. 의원으로서 크게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의원 생활 초반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듯하다" 1575년 어의를 보조하여 왕의 맥을 진찰했고,1581년 선조의 명으로 《찬도방론맥결집성》이라는 진맥학 책의 오류를 바로잡아 책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했으며,1587년 다른여러 어의와함께 왕의 진료에 참가하여 병의 쾌유에 대한 상으로 사슴가죽을 받았다는 기록 등 몇 년에 한번씩 단편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왕명으로 진맥학 책을 전술했다는 기록에서 의학자로서 인정받았음을 인정받는다. 당시 왕자의 신분이었던 광해군은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다. 다른 의원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허준이 과감히 나서 병을 고치자 선조는 정3품 당상관인 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내리며 그 공을 치하했다. 서얼 출신의 기술관이었던 허준에게 당시의 신분구조상 허용되었던 벼슬은 정3품 당하관이 최대였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중 다시 한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東班)에 올라, 신분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동반이란 양반 중 하나인 문관을 뜻하는 것으로, 동반에 올랐다는 것은 곧 완전한 양반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자신을 끝까지 따른 문무관이 열일곱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던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한 공을 인정해 허준을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 벼슬을 내렸다. 품계로만 따지면 좌찬성•우찬성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조는 허준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내리려 했다.1606년 오랫동안 차도가 없던 병세가 호전되자 관직의 최고 단계인 정1품 벼슬을 내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신분 질서를 그르치는 잘못된 조치라고 맹렬히 반대하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반대에 성사되지는 않았다.
조선 왕조가 개국된 이후 의관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에 올랐지만,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망령되이 약을 써서 선조를 죽게 했다”는 죄로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허준의 의술로 목숨을 구한 적이 있던 광해군은“허준의 의술이 부족하여”선조를 살리지 못했을 뿐 고의가 아니니 처벌할 수 없다며 감쌌지만,신분을 뛰어넘은 그의 입지에 문관들의 질시와 견제가 만만치 않았던 상황이다 보니 광해군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귀양살이는 1년 8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던 이 기간을 허준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는《동의보감》편찬에 바친다.‘정(精). 기(氣). 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의 양생학적 신체관과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위주로 한 의학적 전통을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통합했다”는 평을 받는 이 책은 이후 조선 의학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으며, 오늘날까지도 한의학도에게 널리 읽히는 명저이다.
1609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광해군은 당시 나이 일흔한 살의 허준을 내의원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을 돌보게 했다. 한양에 돌아온 그는 마침내 완성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이후 역병에 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벽역신빙》을 편찬했다. 그러다 1615년 일흔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 뒤 정1품 보국숭록대부 작위가 추증 되었다.
평 가
허준의 의술에 대해 선조는‘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 노련하다”고 평했으며,정조 대에 나온 《의림촬요》에서는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신묘함이 갚은 데까지 이르렀다. 사람을 살린 일이 부지기수다”라고 했다.
또한 조선 의학의 어머니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는《동의보감)은 18세기에 이르면 《상례비요》. 《삼운성휘》. 《경국대전》과 함께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4대 필수 서적으로 선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동의보감》 이후에 간행된 조선 의서들 모두가 이 책의 자양분을 근거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는데,18세기 후반 실학자 홍대용이 베이징에 다녀오면서 베이징 의시들이 《동의보감》을 매우 진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흐뭇했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한편,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안한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이제마는 역대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장중경,주굉에 이어 세 번째 인물로 허준을 선정하기도 했다.
이런 학술적 평가와 달리 민간에 전해지는 허준의 모습은 맹수에 물린 코끼리를구해주고,상처 입은 호랑이를 고쳐주었으며,만병통치약 비슷한 약을 써서 온갖 병을 다 고쳤다는 등 설화의 옷을 입고 있다.
유하춘
1513년(중종 8)~1577년(선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미암(眉巖)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47년 양재 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석방되었다. 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예조참판•공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으므로 항상‘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했다. 《미암일기》.《속몽구》.《역대요록》등의 저서를 남겼다.
홍대용
1731(영조8)~1783(정조7) 조선 후기의 실학자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지구의 자전설,균전제•부병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 개혁,과거제도 폐지와공거제에 의한 재 등용 신분차별 없이 이상의 모든 아동을 교육 시키자는 등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