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어머님사랑-백년설///李珥

bsk5865 2015. 1. 28. 12:0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1.28 06:15

 

어머님사랑-백년설///李珥(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674 


어머님사랑-백년설


어머님사랑-백년설

작사 조경환 작곡 이재호


세상길 험한 파도 캄캄한 항로
어머님 조각배엔 폭풍이 닿소
잔 위에 실은 노래 한숨 서려도
눈물을 삼켜가며 힘차게 사오..


새벽달 비꼈구나 들창 너머로
쓸쓸한 창살위에 오동잎 진다
가야금 줄에 얽힌 어머님 사랑
아들 자 떼 버리면 세상도 없소..


어머님 참사랑을 내가 압니다
분단장 주름살에 눈물이 서려
세상이 다 비웃는 생애라 해도
나에겐 다시 없을 어머니라오


李珥

생몰년도: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자: 숙헌(淑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齊)
시호; 문성(文成)
활동분야; 학문


생애와 업적

강릉 북평 마을의 친정에 살고 있던 신사임당은 1536년(중종 31)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꾸었다. 검은 용이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 쪽 마루 천장에 스며드는 꿈이었다. 그러고 며칠 뒤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을‘현룡(見龍)’이라고 했다. 현룡은 이이의 어릴 적 이름이다.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 사이의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이이의 유년 시절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글을 많이 읽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사임당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그런 어머니를 이이는 극진히 사랑했다.

이이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세 살 때 외할머니가 석류 열매를 보여주며 “무엇과 같으냐?"라고 묻자 옛 시를 인용하여“부서진 빨간 구슬을 껍질이 싸고 있다”라고 대답해 주위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 세 살에 이미 글을 깨우친 것이다. 또한 네 살 때는《사랙의 첫 권을 배우면서 스승이 문장 부호를 잘못 붙여놓은 것을 찾아낼 정도로 영특했다. 그리고 열세 살에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열여섯 되던 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이는 큰 충격을 받는다. 맏형과 함께 아버지의 출장 길에 동행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송함까지 겹쳐 마음의 상처는 더욱 컸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이이는 3년 상을 치른 뒤 불교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한번 불교에 귀의하면 관직으로 나갈 길이 영영 막혀버리던 시대였다1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산하여 다시금 성리학에 몰두하기는 했지만, 한때 불교에 심취했던 경력은 오랫동안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공격거리로 이용되었다.

금강산에서 내려온 이이는 강릉 외가에 머물며 다시 학문에 정진하여 1556년(명종 11) 스물한 살의 나이로 한성 별시에 장원급제 하고,이듬해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했다.

이해에 이이는 이황과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번의 만남을 갖는다. 아마도 장인이 있는 성주에 가면서 안동에 머무르던 대학자를 찾아갔던 듯한데,이 자리에서 이이는 이황을 스승으로 모실 것을 다짐했고 이황은 이이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다. 이 만남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대면하지는 못했지만,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에 대한의견을 나누었다. 훗날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이이는 스승에 대한 예를、갖추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이는 그 해 겨울 한성 별시에 장원 급제 하는 등 이후 전부 아홉 번의 과거에서 아흡 번 다 장원으로 합격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며 칭송을 받았다. 특히 한성 별시에서는 시제에 대한 답안으로 〈천도책: 天道策〉이라는 글을 썼는데,‘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을 주장한 이 시험답안은 당시 시험관들의 감탄을 자아 냈을 뿐 아니라 이후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과거에 최종 합격해 중앙 관직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에 이르러서였다. 금강산 입산을 전후하여 방황하던 시간과 부모의 죽음으로 각각 3년 상을 치르며 보냈던 6년간의 공백 때문이다.

호조(戶曹) 좌랑(佐郞)을 시작으로 그는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등 삼사의 언관직을 두루 거치며 명종 대를 보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를 이었다. 당시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던 하성군은 사가에서 자라며 성리학자인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자 조광조를 신원(伸寃)하여 영의정을 추증 하는 등 사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사헌부 대사헌,호조판서,이조판서,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치며 임금을 보좌하는 한편 충직한 간언을 마다하지 않았다.<동호문답〉이라는 글을 지어 자신의 시대가 경장기(更張期)이므로 대 개혁의 경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만언봉사〉에서는 시대 상황에 적합한 제도와 법을 만들어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이이는 학문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려 했던 정치가였다. 사림이 동서 분당으로 나뉘어가던 무렵 이이는 온 힘을 기울여 당쟁의 화근을 막으려 했고,잡다한 일체의 공물을 폐기하고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수결수미법(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하는 등 민생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이 사상의 특징은‘이기지묘(理氣之妙)’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를‘이’ 와 '기’의 구성으로 파악한 것은 다른 이기론 자들과 같다. 그러나 이이는 이' 나 '기' 어느 하나만으로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기는 본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지만,그렇다고 ‘이’가 '기’이고 '기’가‘이’인 것은 아니다. 이같이 둘이면서 하나로 존재하고 하나로 있으되 둘인 이기의 관계를 이기지묘라 했다. 그러면서 이를 바탕으로 기발이승(氣發理乘)과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했다. 기발이승이란,운동하는 것은‘기’요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으면서‘기’에 타서‘기’의 운동원인이 되는 것이‘이’ 라는 의미이고,이통기국은‘이’는 형상이 없으므로 언제 어디서나 두루 통하지만,'기’ 는 형상이 있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황이 주자의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이이는 이황이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이황의 제자들은 동인으로,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으로 나뒤어 정쟁을 벌이게 되지만,이황과 이이는 서로를 존경하고 아꼈으며,학문적으로 보완하는 관계였다.

이이는 이황 이외에도 성혼•정철•박순•송익필 등과 친교를 맺었고 김장생•조헌•정엽 등의 제지를 배출했다. 이이를 계승한 김장생의 학통은 아들 김집을 거쳐 송시열에게 이어졌다. 이후 조선 후기를 주도하는 세력인 서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이이에게서 찾았다.

격무와 지병으로 시달리던 이이는 한창 일할 나이인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병석에 눕더니 끝내 병을 떨치지 못하고 그 해 한성 대사 동에서 눈을 감았다. 이이가 죽기 하루 전날 검은 용이 방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부인 노씨가 꾸었다고 한다.


평 가

1624년(인조2)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7)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제사가 철폐(撤廢)되었다가 5년 만에 복향(復享)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그가 배출한 많은 제자들은 조선 후기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던 이이는,이황이 관료로서보다 학자로서 더 많은 성취를 이룬 것과는 대조적으로,학자로서 뿐 아니라 탁월한 업적을 남기는 관료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위패는 문묘와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파주의 자운서원,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귀암서원,서흥의 화곡서원 등 전국 20여 개의 서원에 모셔졌다.

이이의〈졸기〉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성품이 매우 탁월하고 수양이 매우 깊어서 명랑하고 화기에 찼으며 평탄하면서도 영단이 있었다. ……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를 존경하자 않는 사람이 없었다 ....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고,그가 건의한 정책은 후에 모두 채택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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