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우재(尤齋) 시호; 문정(文正) 활동분야; 학문,정치 다른 이름: 성뢰(聖賚)
생애와 업적
조선 후기의 역사서《연려실기술》은 송시열의 죽음에 대해 상반 된 두 개의 기록을 함께 전한다. 먼저 김재구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조야회통》을 인용하여“우암 송시열은 직령의(直領衣)를 입은 뒤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밤 한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우암이 죽은 지붕 위에 뻗쳤다”라고 그의 마지막을 전한다. 규성은 28수 별자리 가운데 하나로,문운(文運)을 맡은 별이다. 그의 죽음으로 천하의 문운이 다했다는 의미이다. 반면 나량좌가쓴《명촌잡록》을 인용한 글에서는“정읍에서 사약을 받던 날 도사 권처경 앞에 꿇어앉아 말 하기를,이것은 양진의 어찰인데 감히 우러러 바칩니다 라고 하였다. 권처경이‘나는 사사하라는 명만 받았으니 어찌 갖다 드리겠소’라고 거부하고 서리에게 그 편지를 빼앗게 하고 그 자손에게 주었다. 송시열은 계교(計巧)가 궁하자 다리를 뻗고 드러누웠다. 도사 권처경이 재촉했으나 끝내 마시지 않으므로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라고했다. 이찰을 빙자해 목숨을 구걸하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사약 마시기를 거부하는 추태를 부리다 죽었다는 내용이다.
송시열은 여든세 살의 나이에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역적이 아니면 대신에게 사형을 내린 전례가 없는 조선시대에 대신의 신분으로 죄인들이 수괴(首魁)라는 죄명으로,사약을 받은 그는 어떤 인물인가. 어떤 인물이길래 살아서는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저렇듯 극단적인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일까.
송시열은 1607년(선조 40)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뒷날 그와 더불어 ‘양송(兩宋)이라 불리는 송준길의 집에 가서 함께 공부했고,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한테 《격몽요결》.《기묘록》등을 배웠다. 그리고 열여덟 살 무렵부터 김장생의 제자가 되어,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게 성리학과 예학(禮學)을 배웠다. 이렇게 하여 송시열은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적통이 될 수 있었다. 이 당시 기호학파는 붕당으로는 서인에 해당했으므로 기호학파의 적통인 송시열은 서인의 우두머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스물여섯 되던 해 생원시에서 장원 급제한 그는 스물 여 넓이 되던 1635년 인조의 차남인 봉림대군의 사부가 된다. 1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 두 사람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적인 현장을 함께 목격한다. 그 뒤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인질로 잡혀가고 송시열은 낙향하여 13년 동안 학문에만 몰두하지만,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효종은 즉위와 함께 청나라에 대한복수,북벌을 외치며 청을 배척하는 세력과 재야학자들인 산림(山林)을 대거 기용했다.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사헌부 장령 등의 벼슬을 내렸다. 이때 벼슬에 나아가며 송시열이 장문의 상소를 올리는데,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드러낸 이〈기축봉사〉에서 그는 존주론(尊周論)과 북벌론을 주장했다.
존주론이란 주나라에서 일어난 중화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이제 조선뿐이라는 주장으로,이는 이후 조선중화주의로 발전한다. 북벌론은 청나라에게 심복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효종의 북벌 의지에 맞는 이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송시열은 북벌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된다.
그러나 사실 효종이 생각하는 북벌과 송시열이 생각하는 북벌은 그 의미가 달랐다. 효종은 빠른 시간 내에 군사력을 길러 청나라를 치자고 주장했지만,숭명사상(崇明思想)에서 비롯된 송시열의 북벌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적 북벌론이었다. 삼강오륜을 통해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윤리도덕을 건설해 유교의 윤리도덕 위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송시열이 말하는 북벌이었다.
효종이 청나라를 치기 위해 급격히 군사력을 키워나가려 하자 대신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효종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송시열에게 정권을 넘기는 협상을 벌이며 그를 북벌에 동참시키지만,갑작스런 효종의 죽음 이후 군사적인 북벌 노력은 시도된 바 없다.
그리고 1659년 효종의 죽음 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시작된다. 효종에게는 계모가 되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3년 입어야 되는지 1년 입어야 되는지 하는 문제로 시작된 예송논쟁에서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은 1년 설을 주장하고 남인을 대표하는 허목은 3년 설을 주장하여 팽팽히 맞섰다. 사실 이는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인가,차 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따라서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민감한 사항이었다. 또 왕실의 예가 일반 사대부의 예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송시열과 서인들은 왕실의 예도 사대부의 예와 다를 배 없다는 사대부 중심의 주장을 펼쳤고,남인들은 왕실의 예는 사대부의 예와 다르다는 왕권 중심의 주장을 펼쳤다.
결국 서인 측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일단락 되었지만,15년 뒤 효종 비인 인선왕후가승하 하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불거졌다. 이때 다시 한번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송시열이 유배길에 오르는 등 서인들에게 커다란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갑작스럽게 현종이 죽고 열네 살의 숙종이 즉위한 뒤 서인은 경신환국(康申換局)으로 남인을 몰아내고 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숙종은 송시열에게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며 중앙 정계에 복귀시켰다. 이 무렵 송시열과 제자 윤증 과의 불화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다 그 뒤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해 청주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여든세 살이 되던 1689년(숙종15) 숙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에게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들이 축출되면서,송시열은 왕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귀향 가고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산림의 수장으로, 서인의 우두머리로 효종 대부터 숙종 대까지 정국을 주도했던 송시열의 제자는 무려 900여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당상관 이상벼슬에 오른 자 만도 54명이었다. 이들을 통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송시열은 당쟁의 와중에 죽음을 당했지만,그의 당파인 노론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문묘에 배향되고‘ 송자(宋子)’ 라 칭해지며 주자에 비견될 만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평 가
송시열이 죽은 뒤 5년이 지난 1694년(숙종 20) 노론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집권해,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도 무덤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같은 해 복권되고,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소론과의 갈등마저 완전히 끝난 1756년(영조 32)에는 유학자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문묘에 종사되고,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또한 정조는 대로사(大老祠)를 세워 송시열을 배향하면서,친히 대로사 비문을 짓고,국비로《송자대전》을 간행했다. 이때부터 공자•주자를 잇는 송자로 추숭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당쟁의 원흉’ 자대주의자의 수장’으로 급락한다. ‘민생은 돌보지 않고 당쟁이나 벌인 주역’이라는 평가는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송시열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와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 주장에 따르면,송시열은 대동법•양반 호포론•노비 종모종량법 등을 주장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이상사회로 만들어가고자 했던 자주적인 개혁가였다는 것이다.
경신환국
1680년(숙종 6)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을 말한다.1674년(현종 15) 예송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숙종 초기의 정국을 주도했다. 남인은 훈련도감과 어영청까지 장악하며 세력을 더욱 키워갔다.
그러다 경신년인 1680년 3월 영의정 허적이 그 아버지가 나라로부터 시호를 받고 또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잔치를 열면서,비가 오자 마음대로 궁중의 기름천막을 가져다 썼다. 이를 허적의 전횡으로 판단한 숙종은 전격적으로 허적을 비롯한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재집권시켰다. 이것이 경산환국이다.
가사횡국
1689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한 사건을 말한다. 빌미가 된 것은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의 원자 정호 문제였다. 숙종의 계비 민씨가 왕비가 된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후궁인 숙원 장씨(淑援張民)를 총애했다. 그러던 중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숙종은 장씨가 낳은 아들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했으나,당시의 집권세력인 서인은 그에 반대했다. 남인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했고,숙종은 숙종대로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원자의 명호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했다.
이때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가 잘못이라고 반발했다. 숙종은 원자 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한나라의 원로정치인이 상소 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며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렸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남인이 집권했으며,왕비 민씨는 폐출되고, 장희빈이 정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장씨가 방자한 행동을 하자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던 숙종은 1694년(숙종 20) 남인을 몰아 내고 노론과 소론을 다시 기용하는 갑술환국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