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の銀座-黒澤明とロス・プリモス 作詞 富樫政子 作曲 中川博之
一 雨の銀座の 街角で 一人涙に 濡れながら うそと知りつつ 待ちました 男ごころは 移り雨
二 女ごころの 古傷に かけた情けが うれしくて うそと知りつつ 待ちました 恋の銀座は 小ぬか雨
三 濡れて待つ身の みじめさを 一目あなたに 見せたくて うそと知りつつ 待ちました 女泣かせの 通り雨
四 ついてゆきたい どこまでも それが女の 意地だから うそと知りつつ 待ちました 夜の銀座は にわか雨
五 雨よ雨雨 降らないで 今日も銀座の 街角で うそと知りつつ 待ちました 馬鹿な女の 涙雨
東洋과 西洋이 만나는 Turkey Istanbul 터키의 正式名稱은 터키共和國(Republic of Turkey)이며 우리나라의 國土 8倍에 이르고. 約 7千400万 名의 人口 中 99.8%가 무슬림입니다. 하지만 世俗主義를 採擇해 이슬람 以外의 信仰의 自由도 保障됩니다. 또 積極的으로 西歐 文明을 받아들여 中東의 이슬람 國家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지금의 터키 女性들은 누구나 運轉免許를 發給받을 수 있으며 어깨선과 쇄골이 드러나는 옷도 自由롭게 입을 수 있습니다. 이는 무슬람의 原理主義 勢力들이 터키를 長期的 觀点에서 膺懲의 對象으로 삼는 理由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스탄불을 찾아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라마단 期間이었습니다. 라마단은 이슬람歷의 9月로 무슬림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食飮을 全廢하는 게 義務입니다. 물을 마시는 것조차 禁止됩니다. 肉體的 欲求를 節制하고 가난한 이웃의 배고픔을 理解하면서 信仰을 한 걸음 成熟시키는 契機로 삼자는 게 그 趣旨입니다. 어린이, 老弱者, 妊娠婦, 旅行者 等을 除外한 世界 모든 무슬림은 이를 지켜야 합니다.
世俗主義 國家인 터키의 라마단은 豫想 밖이었습니다. 터키는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 등 自然 景觀만 唯一無二한 게 아니었습니다. 라마단 期間에도 버젓이 午餐을 즐기는 風景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낮에도 이스탄불 都心의 食堂과 카페는 거의 例外없이 門을 열고 손님을 맞았습니다.
繁華街인 탁심(Taxsim)의 패스트푸드店에서도 飮食을 먹는 이들 中 터키人이 分明한 境遇가 많았습니다. 친구끼리 또는 家族끼리 앉아 남의 視線을 介意치 않고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있었습니다. 이스탄불의 라마단은 낮 동안 飮食 販賣는 勿論 陳列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大多數 이슬람 國家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스탄불은 複雜多端한 터키 歷史의 綜合 세트로 볼 수 있습니다. 보스 포루스 海峽을 사이에 두고 小아시아와 발칸半島에 걸쳐 있습니다. 地理的으로, 歷史的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징검다리에 該當됩니다. 그로 因해 실크로드를 通해 이루어진 東西洋文明 交流의 果實을 실컷 맛볼 수 있었습니다.
特히 4世紀부터 15世紀까지 이곳의 主人으로 君臨한 비잔틴 帝國은 地球上에 存在했던 帝國 中 가장 華麗한 遺産을 남겼습니다. 西유럽이 中世 暗黑期에 머물러 있는 동안 東西洋의 學問과 藝術이 融合된 文明을 꽃피웠습니다. 勿論, 그 華麗한 名聲에 흘린 4次 十字軍 遠征隊가 侵入해 掠奪과,破壞를 當해야 하는 受難도 겪었습니다. 이스탄불의 主人은 1453年 비잔틴 帝國에서 오스만 투르크로 바뀝니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皇帝가 首都를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330年부터 持續된 基督敎 文明이 膜을 내리고 이슬람의 時代가 열리게 됩니다.
現在 이스탄불 人口의 大多數를 차지하는 투르크(Turk) 族은 그 발자취가 커다란 실타래 같습니다. 몽골 高原에서 發源한 遊牧民族으로 中央아시아를 가로질러 발칸半島까지 進出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中國이 突厥이라고 부른 北方遊牧民族이 바로 오늘날 터키의 祖上입니다. 高句麗와도 交流했던 突厥이 異域萬里 떨어진 小아시아에 定着했으니 歷史가 얼마나 波瀾萬丈한지는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보스포루스 크루즈는 歷史가 얽히고 설킨 이스탄불 旅行의 워밍업으로 삼을 만합니다. 世界 어디에 내놓아도 遜色이 없는 이 멋진 都市를 한 발자국 떨어져 感想하는 코스입니다. 海峽 兩岸으로 비잔틴과 오스만 투르크 時代에 建築된 城壁, 宮殿,寺院들이 지나갑니다.
그 빛나는 遺産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낯선 아름다움에 對한 感興이 일어납니다. 보스포루스 크루즈는 갈라타 다리 隣近의 에미뇌뉘(Eminonu) 船着場에서 탈 수 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船着場으로 定期 旅客船과 크루즈 船舶이 隨時로 運港됩니다.
2005年 4月 韓國大統領으로는 처음으로 노무현 前大統領이 訪問하여 當時 에르도안 터키 總理와 보스포루스 크루즈를 타고 極讚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탄불에는 보스포루스 크루즈 以外에 꼭 타봐야 할게 있습니다. 탁심의 트램입니다. 한 輛짜리 電車가 탁심 廣場에서 出發해 이스티크랄(Istiklal) 거리를 가로지릅니다. 車窓 밖으로 지나가는 中世 風 花崗岩 建物과 世界 各地에서 찾아온 觀光客을 바라보며 旅行의 韻致를 맛볼 수 있습니다.
탁심은 흔히 서울의 明洞에 比喩합니다. 오랜 歷史와 名聲을 자랑하는 商店,食堂이 즐비해 年中觀光客이 넘쳐납니다. 幅이 넓은 이스티크랄 거리를 中心으로 兩便에 古色蒼然한 建物들이 堵列해 있습니다. 그 中 露天카페는 한 번쯤 利用할 만합니다. 이스탄불에서 마시는 커피는 남다른 意味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은 커피가 유럽 全域으로 擴大되고 汎世界的인 飮料로 발돋움하는데 決定的인 役割을 한 張本人입니다.
카페의 原祖인 ‘카흐베하네’ 가 바로 이스탄불에서 誕生했답니다. 이슬람 敎理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는 무슬림 들에게 카흐베하네는 서로 어울려 情談을 나누는 곳으로 中世時代 人氣를 모았답니다. 16世紀 中半 이스탄불에는 600余 個의 카흐베하네가 있었다고 합니다.
술탄 아흐멧(Sultan Ahmet) 地區는 이스탄불 舊市街의 中心입니다. 블루 모스크, 아야소피아(AyaSofya) 博物館, 톱차프宮殿 等이 자리해 이스탄불 旅行의 하이라이트에 該當됩니다. 터키 旅行의 畵龍點政으로 알맞은 곳입니다. 블루모스크는 술탄아흐멧모스크의 別稱이기도 합니다. 17世紀 初 오스만 투르크의 14번째 술탄人 아흐멧 1世가 세웠습니다.
터키를 代表하는 이슬람 寺院으로 높이 43m,直徑 23.5m의 巨大한 中央 돔과 6個의 尖塔이 印象的입니다. 안뜰을 지나 觀光客을 爲한 南쪽 出入門을 通해 寺院 內部로 들어서면 푸른色 타일로 粧飾된 雄壯한 기둥과 壁이 보는 이를 壓倒합니다.
偶像崇拜를 禁하는 이슬람 律法에 따라 壁畵와 彫刻은 一切 없습니다. 그 代身 植物의 꽃과 줄기, 아랍 文字, 幾何學 等에 基礎한 文樣인 아라베스크가 壁面과 천장에 아름답게 具現돼 있습니다. 블루모스크에선 터키 무슬림들의 日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손발을 씻고 寺院안으로 들어가 이슬람 經典인 코란을 읽거나 카핏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祈禱합니다.
全世界 모든 무슬림이 그러하듯 祈禱는 언제나 메카를 向해 드린답니다. 블루모스크 안에도 메카方向을 나타내기 爲해 한쪽 壁面에 아치形으로 움푹 들어간 벽감 卽 미흐랍(Mihrab)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過去 오스만 투르크의 皇帝들은 메카의 카바 神殿으로 巡禮를 떠날 때 블루모스크에서 祈禱한 後 出發했다고 傳해옵니다.
아야 소피아博物館은 블루모스크와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비잔틴 帝國의 유스티니아누스皇帝의 指示로 着工해 537年에 完工됐습니다. 聖堂이자 비잔틴皇帝의 戴冠式이 열리던 場所로 當代 單一 建築物로 世界 最大 規模였습니다. 오스만투르크가 이스탄불을 占領한 以後 이슬람寺院으로 轉用했으며, 지금은 博物館 門牌를 달고 있습니다.
아야소피아는 博物館임에도 不拘하고 展示物은 거의 없습니다. 建物 自體가 展示物인 셈이죠. 本堂 中央의 돔은 높이 56m, 直徑 31m 規模로 竣工 當時에는 기둥을 使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地震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爲해 鐵製 構造物이 돔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정에서 錘를 내려 建物의 기우기를 늘 책크 한답니다. 雄壯한 規模도 볼거리이지만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本堂 回廊의 모자이크 聖畵입니다. 聖堂이 이슬람 寺院으로 改造되면서 회칠로 가려졌던 部分이 後代에 發見된 것입니다. 비잔틴 藝術의 總和로 봐도 無妨하네요.
톱카프 宮殿은 보스포루스 海峽이 마르마라(sea of Marmara)와 만나는 地点에 있습니다. 陸地가 바다 쪽으로 突出된 丘陵 위에 자리해 風光이 뛰어납니다. 비잔틴을 무너뜨린 술탄 메흐멧 2世가 지은 宮殿으로 1923年 터키共和國 出帆 以後 一般에 公開했습니다.
톱카프 宮殿의 城壁 길이는 총 5km에 達합니다. 높은 城壁 안에는 술탄의 寢所와 執務室, 술탄의 女子들이 居住하던 하렘, 寺院과 圖書館, 庭園과 亭子 等이 造成돼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가 靈感을 얻었다는 正門을 지나 들어서면 넓은 庭園이 나타납니다.
庭園은 1万 名이 行事를 치를 程度로 넓은데,오른쪽이 부엌이고 왼쪽이 마구간입니다. 約 1千 名의 料理部隊가 飮食을 만들던 부엌은 現在 陶瓷器 展示室로 利用되고 있습니다. 宮殿 內 所藏된 1万2千余 点의 陶瓷器 中 一部를 볼 수 있는데 中國에서 건너온 靑瓷와 白瓷가 눈길을 끕니다. 부엌과 一直線上에는 술탄의 衣裳 展示室, 寶石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寶石館은 女性 觀覽客들이 가장 關心을 보이는 곳으로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렘은 작은 庭園을 中心으로 400余 個의 房이 稠密하게 모여 있습니다. 少女 時節에 하렘에 들어온 宮女들은 술탄의 關心을 받으면 後宮이 되거나 드물게는 夫人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王妃의 자리를 만들지 않아 하렘의 女人들 사이에선 술탄의 눈에 들기 爲한 競爭과 暗鬪가 熾烈했다고 합니다. 絶對權力 周邊 女人들의 이야기는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大體로 아름답지 않은 法이네요.
作成者 黃圭源 | |